[반세기, 기록의 기억] 비나이다 비나이다, 노고단 돌탑 쌓듯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살게 해주세요

기자 2023. 1. 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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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지리산 노고단
1971년 겨울, 2022년 가을 지리산 노고단.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노고 할머니와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신라 화랑들이 노고단에 돌탑 기초를 다지며 나라의 번영을 두 손 모아 기원한다. 수련을 위해 지리산 봉우리에 올라온 화랑들이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낸 단을 노고단이라 불렀고 ‘노고’란 늙은 할머니를 뜻하는 지리산 성모(聖母)다.

“왜적들을 몰아낼 수 있게 힘을 주소서.”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된 화엄사에서 4시간을 걸어 노고단에 도착한 구례군 의병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탑에 돌멩이를 쌓는다. 숨어있던 바람이 몸을 일으켜 의병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준다.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 노고단에서 소원을 빈다.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돌멩이 하나씩을 돌탑에 얹으며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섬진강 물줄기를 바라본다. 어머니 얼굴을 보듯, 그들의 비장함에 지리산 세찬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이 결사항전 각오를 다지며 돌멩이를 올려놓는다. 그들의 손가락 온기가 돌멩이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 공비 토벌대가 노고단에 나타난다. 돌탑 위에서 빨치산과 토벌대 소원 돌멩이가 총알처럼 일발장전되고 지리산 운무가 노고단 턱밑까지 차오른다.

박정희·전두환 시절, 민주정부 수립의 간절함과 독재정권의 영구집권 야욕이 담긴 돌멩이들로 원뿔 모양 노고단 돌탑은 몸통이 점점 굵어진다. 모순된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지리산 노고 할머니, 주름살도 늘어난다.

2023년 새해, 해발 1507m 지리산 3대 봉우리 노고단에 해가 떠오른다. 일출의 잔여 햇살이 돌탑 틈새에 살포시 깃든다. 등산객들이 노고단 근처, 널려있는 손톱크기만 한 돌멩이도 주워 큰 돌 사이에 끼워 넣는다. 돌탑에서 굴러떨어져 내린 남의 돌도 챙겨 다시 올려준다. 남의 돌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내 돌 끼워 넣는 사람은 없다.

보잘것없는 잡돌들이 조각조각 채워져 서로를 지탱하고 햇살도 접착제처럼 힘을 보탠다. 돌탑은 소망응집 바위가 된다. 지리산 삭풍도 견뎌낸다.

새해는 이렇게 좀 살자. 칼바람처럼 몰려온다는 경제위기에 손끝, 발끝이 아려오지만 내 것 네 것 없이 노고단 돌탑 쌓듯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보자! 지리산 노고 할머니의 새해 소원이다.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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