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환경투자” “무늬만 친환경” 샌드백 된 월가 황제

성유진 기자 2023. 1. 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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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투자’ 내세운 핑크 회장
보수·진보 양측서 집중포화
래리 핑크(오른쪽) 블랙록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작년 10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금융연구소 연례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는 지금 (ESG 때문에) 좌파와 우파에서 똑같이 공격받고 있고, 그래서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이끄는 래리 핑크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두 건의 사임 요구서를 받아들었다. 지난달엔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가 블랙록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기조가 수익 추구 의무와는 거리가 멀다며 공개적으로 해임을 요청했다. 이보다 한 달 전에는 행동주의 헤지펀드 블루벨 캐피털이 “블랙록이 ESG를 외치면서도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며 회사 신뢰도를 훼손하고 있다”며 CEO 교체를 요구했다.

무려 1경원 넘는 자금을 굴리며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핑크 회장이 요즘 미국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개인 재산만 10억달러(약 1조2700억원) 넘는 억만장자이면서도 진보 진영에서 높은 인기를 누려온 ‘금융시장의 황제’가 어쩌다 이런 궁지에 몰리게 됐을까.

◇금융시장 황제가 된 진보주의자

현재 70세인 핑크 회장은 월가의 전설로 통한다. 1952년 신발 가게 주인 아들로 태어나 1976년 월가 투자은행 퍼스트 보스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최연소 임원이 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투자 과정에서 금리 하락을 예상하지 못하는 바람에 1억달러의 손실을 내며 회사를 떠났고, 1988년 블랙스톤 산하에 작은 금융회사를 차렸다. 1992년 블랙록으로 사명을 바꾼 회사는 블랙스톤에서 독립한 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전후로 메릴린치와 바클레이스의 자산운용 부문을 잇따라 인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작년 3분기 기준 8조달러(약 1경원) 자산을 굴리는 세계 1위 자산운용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급성장의 배경에는 민주당 지지자로 알려진 핑크 회장의 정치적 영향력도 한몫했다. 오바마 행정부 1기 재무장관을 지낸 티머시 가이트너와 특히 가까웠던 그는 금융 위기 수습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정부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가이트너는 금융 시장이 정부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기 원할 때 핑크에 가장 자주 의지했다”고 전했다. 그는 부자 증세와 ‘큰 정부’에 대해서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칭하기도 했다. 이런 성향과 민주당과의 관계 덕에 민주당 정권의 유력한 재무장관 후보로 여러 차례 꼽히기도 했다.

민감한 이슈에 대해 발언을 삼가는 여느 금융인과 달리 자신의 소신을 드러내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중시하는 ‘주주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고객과 직원,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 관계자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CEO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 등에서 여러 차례 “기업은 단기 이익 대신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한 인터뷰에서는 “공적 연기금을 맡게 된 사람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해당 주에 있는 회사를 사서 일자리 2만개를 없애 주가를 올린다면, 이를 수탁(受託) 행위라고 볼 수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블랙록은 핑크 회장의 이런 철학과 운용 자산을 기반으로 전 세계 금융 시장과 개별 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블랙록이 굴리는 8조달러는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이나 독일, 영국 GDP(국내총생산)보다 많은 금액이다. 이를 바탕으로 블랙록은 연간 1만4000개 이상 기업에서 고객을 대신해 대리 투표를 하거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특정 기업을 넣거나 뺀다. 전 세계 기업과 정부가 매년 초 발송되는 핑크 회장의 연례 서한을 주목하고, 회사의 투자 방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가당착 빠진 블랙록의 ESG

무소불위의 블랙록이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은 2020년 이후 기후 위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다. 당시 핑크 회장은 연례 서한에서 “기후 변화가 기업의 장기적 전망을 결정하는 요인이 됐다”며 발전용 석탄 생산 수익이 전체 매출의 25%를 넘는 기업을 투자에서 제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작년 연례 서한에서도 “우리가 환경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이자 수탁자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며 “기업들의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목표와 계획은 주주의 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플로리다·루이지애나주 등 보수 성향의 주 정부는 블랙록에 맡겼던 자금을 잇달아 회수하며 반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은 에너지 가격이 이런 움직임에 기름을 부었다. 고물가가 계속되고 경기 침체 그림자가 짙어지자 탈탄소 정책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이다. 반대로 진보 진영에선 블랙록의 친환경 투자가 기대에 못 미친다며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당 소속 시장이 이끄는 뉴욕시는 작년 9월 공개 서한에서 “블랙록의 발언과 행동 사이의 모순이 심상치 않다”며 “블랙록은 화석 연료 기업 투자를 줄이고 구체적인 ESG 이행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사이에서 블랙록은 “화석 연료 사업에 계속 투자할 것(작년 1월)”, “우리는 에너지 산업을 보이콧하지 않는다(10월)” 등 갈팡질팡하며 논란을 키웠다. ESG 관련 주주 제안에 대한 블랙록의 찬성률도 재작년 43%에서 작년 24%로 급감했다.

일각에선 블랙록이 애초에 ESG에 대한 뚜렷한 소신 없이 ESG를 마케팅용으로 내세운 것이 화를 불렀다고 본다. 블랙록에서 2018년부터 2년간 지속가능투자 책임자로 일했던 타리크 팬시는 영국 텔레그래프에 “블랙록의 ESG는 진보 진영에 팔기 위한 의도에 가까웠다”며 “이제서야 블랙록은 자신들이 어느 쪽도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월가가 ESG 상품을 계속 만드는 동기 중 하나는 수수료”라며 “ESG 펀드는 일반적으로 기존 펀드보다 40%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기 때문에 수익에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정치적 논란에도 블랙록은 작년 1~3분기 1930억달러 자금 순유입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논란이 장기화할수록 리스크가 커지고 기업 평판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작년 10월 이런 위험을 반영해야 한다며 블랙록의 목표 주가를 낮췄다. 김동수 김앤장 ESG 경영연구소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ESG 투자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블랙록이 쉽게 논란을 종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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