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그랜드 올드 파티’
미국 공화당에는 민주당에 없는 것이 있다. ‘위대하고 오래된 당(Grand Old Party)’, 즉 ‘GOP’라는 별명이다. “나라를 구해낸 위대하고 오래된 우리 당은 여전히 그 탄생 원칙에 충실하다”는 미네소타주 공화당원들의 1874년 선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854년 창당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함께 노예제에 반대하며 미합중국의 분열을 막아냈다는 자부심이 담겼다. 갓 스무살 된 정당을 ‘올드’하다고 한 것은 민주당보다 어리다는 열등감에서 비롯했을 수 있다. 어쨌든 이제 그 별명이 어울릴 만큼 연륜은 쌓였다.
그런데 GOP가 여전히 하나인지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 연방하원이 지난 3~4일(현지시간) 투표를 6차례나 했지만 신임 의장 선출에 실패했다. 의장은 관례에 따라 다수당이 된 공화당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당내 반란표로 원내대표 케빈 매카시가 의장 당선에 필요한 218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내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 20명은 민주당과 쉽게 타협할 것 같은 매카시 대신 공화당의 다른 군소후보에게 표를 줬다. 2차 투표까지 간 경우도 100년 전 한 번 있었던 걸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새 의장이 선출되지 않으면 의원 취임선서를 할 수 없고 입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나라 망신”이라고 했다.
매카시 개인 문제는 아닌 듯하다. 최근 십수년간 이어진 공화당 정체성 싸움이 터져나온 걸로 봐야 할 것 같다. 티파티를 계승한 프리덤 코커스는 작은 정부 옹호, 이민 반대, 국세청 해체, 낙태 범죄화, 동성혼 반대 등 강경한 입장을 표방한다. 소속 의원은 30~40명으로 알려졌지만, 그 정서는 공화당 내에 퍼져 있고 주요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모습은 1970~1980년대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1990년대 문화적 보수주의까지 덧씌워진 결과이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를 거치며 허무주의에 가까운 규범 부정과 약자 혐오가 당의 얼굴처럼 됐다. 문제는 작은 정부론이 이민·성소수자·낙태 억압과 배치되는 등 이념적 일관성도 없다는 점이다.
링컨의 GOP는 이제 없다. 민주당에 좋은 일만도 아니다. 미국의 양당 구도 대의민주주의, 그보다 더 오래된 연방주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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