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독자로 선생님 번역 보는 일은 경이롭고 멋진 경험이었죠”
[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을 추모하며
지난달 21일 별세한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박정희 정권의 동백림 사건으로부터 태어났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섰을 무렵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간첩단사건(1967년)을 만들어 발표했다.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예술가 등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30세의 천병희도 그 명단에 속해 있었다. 10년형을 선고받고 3년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남북이 분단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아직 적대감보다는 동질감을 더 많이 느끼던 때였다. 하물며 낯선 타국 땅이 아닌가. 독일 유학 당시 호기심에 동베를린으로 “북한 유학생을 만나러 간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될 줄은 몰랐다”고 훗날 회고했다.
혹독한 시련은 사면 후 시작되었다. ‘자격정지 10년’에 묶여 교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도 하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밥벌이도 할 겸 고전 번역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6~10권)였다. 물론 밥벌이는 되지 않았다.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 죄송하고, 무엇보다도 생계가 어려웠다.” “그때는 연탄을 재어 놓고 쌀 한 가마 들여놓는 것이 그렇게도 부러웠다”고 했다. 그 시절 강단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면 용기 내어 고전 번역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그는 회고했다. 시련 속에서 그는 고전번역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그가 한 일과 활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가 가지 않은 길, 하지 않은 일을 함께 이야기할 때 먼발치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발자취가 현실성이란 옷을 입는다. 동백림 사건 이후 천병희는 누구 앞에도 나서지 않는 삶을 살았다. 빛나지 않는 길이었고, 단조롭고 조용해 보이는 삶이었다. ‘나의 몫’을 정하고 ‘지금 여기’에서 그 일을 묵묵히 실행하는 삶이었다.
“10년 세월이 지난 뒤 내가 다시 호메로스의 번역을 손볼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 밝힐 수 있는 것은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도 내 몫은 아니고, 꼭 원전 번역을 읽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도 내 몫은 아니다. 내가 정한 나의 몫은 의욕 있는 독자라면 누구든 그 세계에 빠져들어 마지막 책장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원전에 어긋나지 않게 번역하는 일이다.”(2015년 <오뒷세이아> 두 번째 개정본 역자 서문에서)
누구로부터 소명을 받고 이 척박한 인문학의 땅으로 온 것일까. 그는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소포클레스 비극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전2권),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전2권), 플라톤 전집(전7권) 등 완역이 시급한 목록을 되뇌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그것은 ‘국내 최초 완역본’이란 이름으로 반드시 세상에 나왔다.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일이 아닌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처음 만난 그날이 언제나 가장 새롭고 인상적이다. 단국대 정년 퇴임하던 해(2004년)에 선생님을 처음 찾아뵈었다. 그전에 다니던 출판사에서 선생님의 책을 만든 적은 있지만 전화로 인사를 드린 정도였다. “연구실로 한번 오라”는 전화를 받고서였다. 말수 적은 두 사람이 만난 어색함도 잠깐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컴퓨터를 배워 컴퓨터로 작업해 뽑았다”며 새로 번역한 원고를 내놓으셨다. 나이 지긋한 필자들은 아직 원고지를 사용하던 때였다. 얼마나 작업을 하시려고 퇴임을 앞두고 컴퓨터를 배우신 걸까.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었다. 퇴임하는 노교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트로이 바닷가에서 무구(武具)를 살피는 아테네 장수의 얼굴이었던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방식을 습득해 놓지 않았다면 그 많은 원고 분량을 원고지에 써내려가야 하는 선생님에게도, 그걸 받아 하나하나 입력하고 대조해야 하는 출판사에게도 지난한 전투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만남으로 옮긴이 천병희와 펴낸이(이면서 편집자)인 필자의 동행이 시작이었다. 말이 출판사이지 1인 출판이었고, 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철없이 “어떤 책을 만들까” 하고 이 분야 저 분야를 기웃거리던 때였다.
퇴임 후 선생님은 매일같이 자택의 작은 서재로 출근을 했다. 처음 10년은 하루 7시간씩 노동했고, 그후로는 6시간씩 노동했다. 인내와 체력을 필요로 하는 고된 시간들이었다. 세상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하루 60여 행의 적은 소출을 내면서 40여 종의 고전을 번역했다. 오래 전에 번역한 고전의 개정판도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개정하는 책과 새로 번역한 책이 함께 출간되니 “이 많은 고전을 한 번역가가? 원전번역으로? 그게 가능한가?”라는 반응이 많았다.
퇴임 뒤 첫 만남서 새 번역원고 받아
‘고전 읽을 수 있게 만들자’ 이심전심
하루 6~7시간씩 집중 40종 고전 번역
“그 시간에 스무줄 번역” 강연도 거절
“스스로 정한 번역 숙제 다 풀고 가셔
다음 생 있다면 조금 더 일찍 만나고파”
선생님은 자신의 서재를 그리스 신화 속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빗댄 적이 있다. 한번도 힘든 작업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불꽃 튀는 선생님의 노동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비유라 생각한다. 전쟁의 신과 미의 여신을 한번에 잡은 그물을 만든 천의무봉의 헤파이스토스가 온다 해도 2500년 전 그리스 고전을 우리말로 재련( 再鍊)하기는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과 편집자 사이에 암묵적으로 흐르는 ‘고전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신념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나 오늘날 서양에서나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권장하는 고전이라니 제대로 된 번역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성격이 많이 달랐다. 편집자는 항상 질문이 많았고 전화기가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선생님과 통화를 이어갔다. 교정지를 보며 마주 앉은 상황이 아니어서 어느 대목이 왜 이해되지 않는지 알리기 위해 내용을 더 잘 숙지해야 했다. 그렇게 선생님의 편집자가 되어갔다. 반면 선생님은 교정지 없이 원서만 보고도 편집자의 의혹을 단박에 풀어주며 쟁점으로 바싹 다가와 말씀하셨다. “이해가 안 되면 다른 번역어를 찾아볼까요?”
2010년쯤엔가 인문학 연구 지원활동을 하는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선생님에게 연구교수직을 제안했다. 연 3600만 원씩 2년간 지원받으며 고전 연구를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선생님은 “인문학 분야에는 어렵게 생활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을 지원하라”며 고사했다.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요청이 많았지만 “거기에 다녀올 시간이면 고전을 스무 줄 이상 번역할 수 있는데…”라며 외부 강연 요청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시간 앞에서는 항상 단호했다. 그렇게 번역 시간을 확보했다.
고전이 주는 즐거움, 꼭 있어야 하는 고전 번역이 우리에게 없다는 부끄러움이 샴쌍둥이처럼 한몸으로 다가와 선생님을 꽉 붙든 것 같았다. 그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아직 우리나라에 플라톤 전집이 없다”며 7년 동안을 매달려 플라톤 전집(전7권)을 완역했을 때 선생님은 이미 80세(2019년)였다. “씨름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샅바를 잡고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제 “눈이 침침해” 새로운 번역은 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암진단을 받았다.
시험지를 받았을 때 자신이 몇 문제를 풀 수 있는지 맞히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인지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을 통째로 걸어야 하는 고전 번역이라는 시험지를 기꺼이 받아들고 “여기까지는 풀어 보겠다”고 스스로 정한 분량을 선생님은 풀고 가셨다. 선생님의 첫 번째 독자로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롭고 멋진 일이었다. 그처럼 치열하고 팽팽하게 고전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친 노전사는 이번 생의 소명을 마치고 잠들어 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선생님의 편집자로 조금 더 일찍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천병희 선생님의 노고로 일본어나 영어 번역의 중역을 통하지 않고 우리말로 만나게 된 서양 고전은 책으로 56종, 작품 수로는 119편이다.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이것이 출발점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강규순 도서출판 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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