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방울 없이 우아한 복수극

권이선 2023. 1. 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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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잔혹한 학교폭력의 피해자 동은
죽음의 문턱에서 복수를 결심해
자본과 폭력으로 무장한 가해자
긴 세월 쫓아 서서히 무너뜨려
송혜교 서늘한 복수녀 완벽변신
김은숙표 말맛 더해 톱 10위권
“네가 경찰서까지 갔는데 넌 또 여기 와있고, 뭐가 달라졌니?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학교폭력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은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을 다섯 글자로 정의한다. ‘사회적 약자.’ 부자 부모를 둔 가해자들이 처벌을 피하는 것처럼 가난과 비참함도 상속된다. 미혼모 딸로 태어나 허름한 여인숙에서 ‘달방’ 생활을 하는 동은을 지켜줄 울타리는 없다. 스스로 죽음의 문턱에 오른 동은은 문득 생각한다. “왜 나만 죽어야 하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유년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문동은(송혜교)이 온 생을 걸어 준비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유년시절 학교폭력을 겪은 피해자 복수극을 그린다. 지난해 12월30일 공개된 파트1(1∼8회)에는 동은이 복수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담겼다. 동은의 파괴된 영혼은 몸을 뒤덮은 화상 자국으로 상징화한다. 상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용서라지만, 이유 없는 폭력은 세포 하나하나를 소생 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동은은 온 생을 걸고 치밀하게 준비해 가해자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려 한다.

최근 쏟아지는 ‘사적 복수’ 작품들이 그러하듯 ‘더 글로리’ 역시 계급주의가 휘두르는 폭력을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본다. “‘푼돈’으로 내가 쟤 하늘이 됐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제일 쉬운 것”과 같은 대사나 가해자 집단에서조차 존재하는 위계질서 등을 보여주는 식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자본가와 노동자, 선과 악…. 선명한 대립이 가득한 작품 속 세계관은 마치 흑과 백만 존재하는 ‘바둑판’과 같다. “바둑은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짓고,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 소재 중 하나인 바둑처럼 동은은 폭력의 질서를 차츰차츰 무너뜨린다.
이처럼 그가 선택한 복수 방식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유혈이 낭자한 물리적 앙갚음과는 거리가 멀다. 교사가 돼 가해자 아이 담임으로 교단에 선 동은은 ‘부모 직업’, ‘부모 재력’, ‘부모 인맥’은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저 흑백 바둑돌을 한 수 한 수 두듯 가해자들 추악한 실체를 하나둘 손에 쥐고 이들을 덤덤히 궁지로 몰아넣으며 균열을 만든다.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미스터 션샤인’ ‘도깨비’ ‘태양의 후예’ 등 멜로물 대가 김은숙 작가가 쓴 복수극은 아름다우면서 비극적인 잔혹 동화에 가깝다. 가해자들 앞에 펼쳐지는 비극으로 카타르시스를 끌어내기보다는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해 복수를 준비해 온 피해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 더불어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돕는 강현남(염혜란)과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닌 ‘함께 칼춤 추는 망나니’가 되어준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 주여정(이도현), 이 두 캐릭터는 진한 피해자 연대를 보여주면서도 극 전반 분위기를 전환하는 모멘텀으로 작용한다. 복수극과는 거리가 먼 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대사나 멜로·공포·미스터리 등 장르를 수시로 뒤섞는 기법은 이런 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
김 작가는 말한다. “이 작품을 쓰면서 학교폭력 피해자를 만나고, 글을 찾아보았어요. 그분들은 현실적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한다 하시더라고요. 세속에 찌든 나로서는 진심 어린 사과로 얻어지는 게 뭘까 고민했어요. ‘아, 얻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하는 거구나.’ 폭력의 순간 잃어버린 존엄이나 명예,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것임을 깨달았죠. 그래서 제목을 ‘더 글로리’(The Glory)라고 지었어요. 이 드라마는 이 세상 모든 문동은, 강현남, 주여정 같은 피해자분께 드리는 응원입니다.”

다소 느슨하고 치밀하지 못한 전개 탓에 ‘더 글로리’는 장르물 특유의 긴장감은 떨어진다. 그러나 김 작가 장기인 말맛 나는 대사와 송혜교가 보여주는 낯선 얼굴, ‘비밀의 숲’을 연출한 안길호 감독의 세밀한 연출이 잘 어우러져 폭력에 짓눌린 피해자들을 새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입소문을 탔다. 공개 3일 만에 2541만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3위에 올라섰고, 한국을 포함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싱가포르, 모로코, 홍콩 등 19개 나라에서 톱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해외 매체들은 “송혜교는 미묘한 연기를 통해 상처 입은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1분 만에 문동은의 복수를 수긍하게 된다”(포브스), “시리즈의 매혹적인 미장센과 동은의 서정적인 내레이션으로 보여진 김은숙 작가의 우아한 글솜씨는 금상첨화다”(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등 호평을 냈다. 9∼16화로 제작된 파트2는 오는 3월 공개된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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