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는 자고로 시간을 두고
[원도의 사사로운 사전]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낭만에 취해 현실을 간과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때는 벌써 지난해가 돼버린 2022년 크리스마스. 친구들과 서로를 위한 소소한 선물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성사될 때부터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들뜬 나는 무모한 선택을 해버렸는데, 바로 ‘직접 뜬 목도리 선물하기’였다. 왕년에 뜨개질 좀 했던 터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걸, 새해가 밝은 지금까지 선물하지 못하고 있다. 뜨개질 자체가 어렵진 않았지만 너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유형의 뜨개 방법을 선택한 것이 패착이었다.
약속기한을 맞추기 위해 정말 밤낮으로 뜨개질만 했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식사시간을 쪼개 뜨개질했지만 목도리의 길이는 좀처럼 늘지 않았고, 쓸모를 알 수 없는 그저 네모난 직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일을 벌인지 3주째. 목을 한번 감을 정도의 길이에 멈춘 목도리를 보며 새해부터 한숨을 쉰다. 지난해 계획한 일을 여태껏 끝내지 못했다니. 얼기설기 엉킨 실뭉치를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뜨개는 ‘손으로 뜨는 일’ 혹은 ‘뜨개질하여 만든 물건’을 뜻한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좋아하는 나는 꽤 오래 뜨개방을 들락거렸다. 대바늘로 장갑 뜨는 걸 배울 때는 중지까지 완성한 뒤 중지해버렸고 코바늘로 컵받침을 만들 땐 주구장창 컵받침만 만들다 그만둔 이력이 있다. 일을 벌이는 빈도에 비해 인내는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뜨개방에 모인 사람은 실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가, 바늘에서 빠진 실이 맥없이 풀리듯 금방 흩어졌다. 예비 신랑에게 선물하려고 그 사람에게 꼭 맞는 크기의 조끼를 뜨는 이도 있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뜨개방 안에선 간혹 이뤄지는 대화 사이, 바늘과 바늘이 부딪치는 간지러운 마찰음이 반복적으로 들렸는데 그게 참 좋았다. 인생에 어떤 문제가 벌어지든 다른 실을 가져와 덧대면 그만이라고, 누군가가 등 두드려주는 것만 같아서.
뜨개방에 상주하는 뜨개질 고수분들은 언제고 나의 외침을 들어줬다. 몇코를 잡을지 집중해야 할 순간에도, 혹은 현란하게 손을 놀리며 작업을 이어갈 때도 초보의 도움 요청을 결코 거절한 적 없는 고마운 사람들. 만들던 작품을 망가뜨릴 것만 같던 실수도, 그분들 손길 한번이면 말끔하게 원 상태로 복구되곤 했다.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듯. 실과 실을 엮어 만드는 작업에서 한번 실이 잘못 엮였더라도 남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듯. 인생 또한 마찬가지라는 듯.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상처받거나 홀로 고난에 처해도, 다른 사람에게 치유받거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는 듯.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음에도 완성하지 못한 지금의 목도리를 뜰 때도 마찬가지였다. 뜨개 방법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한 상태로 마음만 급해 초반에 많이 실수했다. 실 사이 연결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구멍이 나기도 하고 겉뜨기해야 할 부분에 안뜨기하는 등 순서를 반대로 진행하기도 했다. 실을 풀고 새로 시작할까 고민하다 그러다간 내년 크리스마스에나 선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더니 웬걸. 목도리 길이가 길어질수록 초반에 했던 실수는 점점 뒤로 물러나 눈에서 멀어졌다. 가까이서 봤을 때 크게 보이는 실수도 일이 진행될수록 희미해지는 건 뜨개나 인생이나 비슷하구나.
무슨 일이든 섣불리 포기하지 말자. 그게 뜨개가 나에게 준 교훈이었다. 뜨개방에서 나를 구원해준 고수분처럼, 삶에서도 나를 도와주는 이 한명쯤은 있을 거라는 믿음을 바늘처럼 손에 꼭 쥐고서. 혹여 무림고수가 메꿔주지 못한 구멍이 있다 한들 어떠리.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라 시리즈물이니까. 초반의 막장도 시리즈의 완성도가 거듭될수록 서서히 잊혀 나중엔 명작이라 칭송받을지 누가 알까. 누군 알았겠나? 나의 목도리 선물 계획이 아직 진행 중일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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