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에 차를 싣고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정갑수 2023. 1. 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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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차박 세계일주 열다섯 번째 이야기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간다

지난 9월 동해항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시베리아 횡단을 했다. 횡단 도중 눈보라를 맞기도 했고 하루에 1,000km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거쳐 튀르키예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만큼이나 그리스도 다녀야 할 곳, 구경할 곳도 많았다. 원래 계획은 그리스에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를 거쳐 크로아티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럽 국가들 중에서 솅겐 조약에 가입한 나라들에서는 총 180일 중 90일을 초과 체류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솅겐은 독일, 프랑스와 인접한 룩셈부르크 남부 지역의 이름으로 여기서 1985년 유럽 5개국이 상호국경개방 조약을 체결했다. 가입국 사이의 국경 검문을 철폐해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조약이다. 유럽을 여권, 세관, 비자도 필요 없는 단일 시장으로 만들게 된 초석이다. 그 후 1993년 유럽 연합EU이 출범하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솅겐 조약에 가입했다.

하여튼 그래서 일단 유럽에 들어오면 반드시 90일 이내에 출국해야만 한다. 그래서 머물 곳과 생략할 곳을 선택해야 하는데, 차박 세계일주의 목표 중 하나는 유럽의 역사, 문화, 미술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발칸 국가들은 생략하기로 했다. 심지어 북유럽 국가들조차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스 서북부에 있는 이구메니차에서 이탈리아 바리를 왕래하는 페리를 타기로 했다. 차를 배에 싣고 지중해를 건너는 날의 아침에 본 일출의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여운을 남긴다.

아름다운 해변 도시 아말피,이탈리아 소나무는 우산 소나무로 불린다.

이탈리아의 겨울 날씨는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온도는 5~15도 사이로 낮에는 걷기에 딱 좋지만 밤에는 약간 춥다. 서울은 영하 15도까지 떨어진다는데 이곳은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바리에서 유심칩을 구입하고 나폴리로 향한다. 유럽에는 공중 화장실도 거의 없고 화장실이 있어도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은 법, 한번 해결책을 찾으면 그것이 일상화 되어버린다. 한국을 떠날 때 휴대용 변기와 대변을 묽게 만드는 약품을 구입해 가져왔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결국 여행 4개월 만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반납했다. 여행 도중 대부분 레스토랑이나 카페, 대형 쇼핑몰, 고속도로 휴게소 등의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샤워실까지 있어서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깨끗한 공중 화장실, 빠른 인터넷, 편리한 교통 체계, 배달 서비스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행 중에 불편함을 느낄 때면 잠시 우리나라의 편리함과 익숙한 문화가 생각나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해변 도시 포지타노,경치는 그림같지만 해안가 절벽에 자리잡은 도시라서 길이 좁고 가파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특유의 개방성으로 대제국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는 멸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로마 멸망에 관한 책 중에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따라올 책은 없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래의 피를 섞지 않고 시민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려는 편협한 정책 때문에 더는 번영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는 공허한 자존심 대신 야망을 택했다. 로마는 노예나 이방인, 적이나 야만족 모두의 장점과 미덕을 취하는 것이 사려 깊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현실적 개방성으로 인해 로마는 제국이 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서서히 멸망해갔다. 로마 멸망의 원인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관계 속에서 멸망했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역사의 순환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는 로마를 이식하기보다 그 지역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민족과 융화된 로마군단들은 오히려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기번은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였다고 한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비관에 빠진 사람들은 내세 지향적인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현실주의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면에서 기번은 역사라는 거대한 순환 고리를 가장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베수비오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나폴리는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였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무렵 로마의 여러 언덕에 마을들이 들어섰고, 서로 통합되면서 기원전 7세기 무렵 도시국가 형태의 왕국이 성립하게 된다. 기원전 500년경에 왕국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이 같이 참여하는 공화정이 세워진다. 이후 로마는 반도를 통일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였고,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한 삼두정치가 제국 성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취임하면서 시작되고, 5현제 시대에 융성하여 최대가 되었다. 하지만 395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당시 문명을 이루고 있던 지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영토는 관료제와 잘 훈련된 로마의 병사들로 유지됐다. 특히 로마법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근세 이후에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망 또한 가히 신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만들어진 도로를 지금도 이용하는 걸 봐도 당시의 문명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거리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1,500년 전에 만들어진 보도블럭들을 만날 수 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나온 벽화

이처럼 로마제국의 역사를 길게 서술한 이유는 로마가 역사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웅변, 옛 애인의 아들까지 암살에 가담시켰던 시저의 최후, 네로의 박해와 기독교도들의 처절한 순교 등 로마 그 자체가 무대이며 드라마다. 무한한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긴 역사의 뒤안길에는 위인과 악인이 교대로 등장하고 일개 군졸 출신이 황제가 되기도 하였다. 웃음을 팔던 여인이 하루아침에 황후가 되기도 하는 등 인간의 미덕과 악덕이 계속 나타났던 역사적인 제국이었다. 그래서 19세기까지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부유한 귀족의 자제들은 길든 짧든 로마로 유학을 오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만 알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베스비오 화산 폭발로 석고가 되어 버린 사람들

잊혀진 도시, 폼페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을 전후로 하여 로마제국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황제의 결정은 종교적 신앙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거대한 로마제국에서는 여러 민족 사이에 잡다한 종교가 퍼져 나갔다. 이 때문에 황제는 스코틀랜드에서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기독교가 안성맞춤의 종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교회는 놀라운 조직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여러 인종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데 성공하는 반면, 약 천 년에 걸쳐 유럽을 중세의 암흑시대로 만들기도 했다. 기독교의 교부들은 우민정책을 폈기 때문에 읽고 쓰는 일은 오직 귀족과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의 발전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고, 사람들은 오직 죽은 뒤 내세에서 받을 하나님의 심판에만 목을 매고 살아가야만 했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시스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까지 지배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멸망은 교회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말피, 포지타노, 소렌토의 해안 도시들을 따라가는 자연의 경치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멋있다. 그에 반해 인간이 만든 집, 도로 등은 다닥다닥 붙어서 생활 조건이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거리에는 청소부들이 없는지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

폼페이 유적 뒷편의 베수비오산은 구름에 가려 무심하기만 하다
폼페이 유적의 발굴은 아직 반밖에 안되어 있다

나폴리는 로마, 밀라노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푸니쿨라를 타고 엘모성 꼭대기에 올라서 보는 산타 루치아 항구로부터 베수비오 산을 끼고 멀리 소렌토까지 둥글게 이어진 해안선을 보면 정말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실감하게 된다. 특히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커서 그리스의 박물관들과 비교해봤을 때 차이가 날 만큼 유물도 많았다. 나폴리는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도시를 건설했지만 결국 로마제국에 점령당했다고 한다. 한때는 스페인에 속하기도 했는데, 1500년대 초에 나폴리 인구는 25만 명에 이르러 프랑스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했다.

나폴리 바로 옆에는 폼페이가 있는데, 로마제국 초기에는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재가 시가지 전체를 덮어버렸다. 당시 인구의 10%인 2,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폼페이는 잊혀진 도시가 되었는데, 18세기부터 발굴이 계속되어 현재는 옛 도시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벽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발굴품은 나폴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폼페이 최후의 날을 다룬 영화와 소설들이 여러 편이 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할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특히 성수기 때 폼페이 유적지의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차는 데다, 발굴 지역이 너무 커서 지도가 있더라도 복잡한 거리에서 길을 헤맬 수 있다.

폼페이 신시가지에서 바라본 베수비오산에 저녁 노을이 진다
나폴리 박물관
나폴리 박물관의 조각상.

폼페이 유적지에서 반드시 가야 할 곳은 약 20여 가지 정도 된다. 그 중 검투장은 콜로세움이 세워진 시기보다 150년 일찍 지어졌으며, 최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포럼, 극장, 사원, 술집, 목욕탕, 세탁소, 사창가, 빵집, 별장 등이 있다. 이 중 사창가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로 침대와 화장실이 있는 10개의 방들로 되어 있으며, 방 안의 문 위쪽으로 성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혼자 여행하다보니 점점 감정이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다.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말이 안 통하니 생각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마치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가 생각난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에게 5가지 자연적인 욕구가 있다고 한다.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3단계의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절실하다. 영화에서는 배송되다 밀려온 배구공에 화풀이를 하다 피가 묻어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공이 나온다. 무인도에서 외로웠던 주인공은 배구공 상표 '윌슨'이 친구가 되어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가끔 윌슨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폴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나폴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정갑수

연세대산악회 OB. 악우회. 핵물리학 박사. 을지대 방사선과 교수 역임. 저서 <물리법칙으로 이루어진 세상>, <브레인 사이언스>,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 <방사능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암벽등반의 세계>, <암벽등반과 스포츠클라이밍>, <겨울산행과 빙벽등반>, <스포츠클라이밍의 거의 모든 것> 등. 히말라야 동계 에베레스트, 탈레이사가르, 트랑고타워 등반.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0m), 북미 최고봉 데날리(6,194m),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등정. 대한민국 체육훈장 대한체육회 연구상 수상.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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