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전시는 서울시와 무관합니다”···떡 하니 세워진 팻말

전지현 기자 2023. 1. 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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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운영 ‘서울아트책보고’ 내 전시 ‘검열’ 논란
관람객 “윤석열차 사건 떠오른다”
4일 서울 구로구 서울아트책보고 내 서점 자각몽 매대 앞. ‘본 전시는 자각몽의 전시로 서울시, 서울아트책보고와는 무관한 전시다’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전지현 기자

“본 전시는 서울시, 서울아트책보고와는 무관한 전시임을 알려드립니다”

서울시 예산으로 운영 중인 복합문화공간 서울아트책보고에서 새해 벽두부터 ‘예술 검열’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달 29일 이곳에 입점한 서점 <자각몽>이 ‘예술과 노동’을 주제로 내놓은 전시품들이 “정치적으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치워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와 ‘화물노조 파업’이 언급된 기획 의도 소개글과 이명박 정부의 노조 탄압을 주제로 한 모의법정 전시가 문제가 됐다.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 안에 위치한 서울아트책보고는 서울시 산하 서울도서관이 수탁업체에게 일임해 운영하고 있다.

전시품 철거 사실을 알게 된 자각몽 측 항의로 지난 1일부터 모든 전시는 원상복구됐다. 대신 해당 섹션 앞에는 ‘본 전시와 서울시는 관계가 없다’는 문구가 쓰인 팻말이 들어섰다. 인터넷 홈페이지의 소개글에도 같은 내용의 안내가 더해졌다. 김용재 자각몽 대표는 지난 3일에 전시 현장에 들렀다가 팻말을 처음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5일 “스탠드를 세워놓은 것도 사실상 방해”라며 “일부러 리플렛도 더 잘 보이게 펼쳐놓고 왔다”고 했다.

‘예술과 노동’ 전시 기획의도 소개 리플렛. 기후위기, 이태원참사, 화물노조 파업, 장애인이동권시위,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2022년의 갈등과 재난으로 명시돼 있다. 전지현 기자

이번 전시는 공연예술 프로듀서 김진이의 서재를 통해 사회적 갈등과 재난 속 예술이 말해야 하는 바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김용균, 김용균들(오월의봄)>, <쇳밥일지(문학동네)> 등의 책들이 전시 대상이다. 기획 의도를 소개한 리플렛에는 기후위기, 이태원 참사, 장애인 이동권 시위, 화물노조 파업 등이 작년에 벌어진 대표적인 갈등과 재난으로 언급돼 있다.

또 ‘공개법정-우리는 대한민국의 노동자입니다’라는 아카이빙 자료도 놓여 있다. 이 전시는 이명박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민주노총을 탄압하며 벌인 ‘노조 파괴 공작’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묻는 모의법정 진행 영상 등으로 구성됐다. 2021년 11월 전태일기념관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김 대표는 지난달 30일 서울도서관 직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이 직원은 “기획 의도에 이태원 사고, 화물노조 파업을 주제로 담았는데, 공공기관이다 보니 사후 논란의 소지가 있는,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갈 수 있는 주제들은 운영 취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수탁업체 측은 문제가 된 부분은 공개법정 전시였다고 했다. 업체 관계자는 “자각몽 기획안을 받을 때만해도 2022년의 사건을 톺아보는 전시라고 생각했는데 이명박 정부 때 일은 기획 취지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며 “민주노총, MB, 국정원 등 언급되는 내용이 너무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논쟁적이라서 ‘헉’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검열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이와 부모가 주로 찾는 문화공간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기가 부담스러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지은 서울도서관 관장은 “해당 전시는 입점 서점과 수탁업체 간에 진행되는 것으로 서울도서관에서 관여할 이유가 없다”며 “철거 과정은 전적으로 현장에 있는 수탁업체가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공개법정’ 전시의 리플렛 일부. 노동조합 파괴공작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이라는 모의 법정을 위한 모의 소장 요약문이 실려 있다. 자각몽 제공

자각몽 측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김 대표는“예술을 다루는 책을 모아둔 도서관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치워도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그 자체가 문화적 검열”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서울도서관과 수탁업체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과도 요구하고 있다. 공개법정 제작에 참여한 변호사와 법학 교수 7명도 이날 “표현행위자의 특정 견해, 이념, 관점에 근거한 제한은 표현의 내용에 대한 제한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해로운 제한” 이라며 서울시에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5일 서울 구로구 서울아트책보고 내 자각몽 섹션에서 전시된 리플렛을 보고 있는 심규정씨(37) 옆에서 딸이 ‘공개법정’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정작 전시회를 보러 온 부모들은 앞선 철거 조치에 대해 갸웃하는 모습이었다. 10세 딸과 함께 이곳을 찾은 심규정씨(37)는 “예술은 예술로만 봐줘야 하는데(그렇지 않으니) ‘윤석열차’ 사건이 떠오른다”며 “아이들에게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기회이고, 사회의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옆에 있던 딸은 공개법정 영상을 재생 중인 아이패드에 관심을 가졌다.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온 원서연씨(35)는 리플렛 등을 살펴본 뒤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책자가 배치되는 건 좋은 것 아니냐”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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