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가 찜한 작가-갤러리(5)94년생 유예림-갤러리기체 이국적이고 모호한 그림 축적된 시간 재현 욕심 獨화랑과 국외 활동 본격화
제목부터 재밌다. ‘우유가 상한 것은 전적으로 날씨 탓’이라니.
그런데 그림은 풍경이나 등장인물이 너무나 낯설다. 황량한 주차장 배경에 그림 속 우유 광고판만 제목과 연결된다.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진다.
1994년생 유예림 작가의 신작 19점을 품은 개인전 ‘조상의 지혜’가 서울 종로구 화동 갤러리 기체 전관에서 펼쳐졌다.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이 등장하는데 어떤 상황인지 도통 짐작도 안 된다. 덩치 큰 인물은 물고기처럼 작은 이빨이 아주 많아 어색하다. 화면 속에서 어정쩡한 구도로 등장하니 오히려 화면 밖 상황이나 화면 전후의 시간을 상상하게끔 자극한다.
전시장 1층에 전시 제목과 같은 대형 그림(227.3×181.8cm)에서 땅 밑에는 한 노인이 죽은 듯 누워있고, 땅 위에는 그가 유령처럼 떠서 강아지와 교감하는 모양새다. 반려견 두 마리를 산책시키려는 두 사람은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눈치다. 수직 수평 구조가 중세 유럽 종교화를 전복한 듯싶다.
전시장에서 만난 유예림 작가는 “낡은 건물 벽을 만지면서 그 장소에 쌓인 시간과 죽음을 떠올리는 행위가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며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므로, 결국 허구이다”라고 밝혔다. 전시 제목인 ‘조상의 지혜’는 묵은 각질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 이미지를 중립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열쇠 역할을 한 단어다.
작가는 작품마다 독특한 제목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제목은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기존에는 작가가 문장이나 문장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내러티브를 이미지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면, 이번 개인전에서는 작가가 가보지 못한 장소나 대상, 그곳에 축적된 시간에 대한 허구적 향수를 이미지로 재현했다. 기존에는 흡수되는 느낌이 좋아 나무 패널에 그리던 방식을 이번에 캔버스로 바꾼 것도 달라진 점이다.
다만 인종이나 성별이 모호한 주체와 장소나 시간도 알 수 없는 배경으로 그림을 그려 작가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감추는 태도는 여전하다. 요리사의 칼질이나 깨진 자동차 유리창, 블라인드를 여는 모습 등 일상 장면도 기이한 작품으로 변신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생물과 비생물 경계가 모호한 ‘알’도 작가가 흥미를 가지는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지난해 초 유예림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은 갤러리 기체는 모 갤러리로서 베를린 기반 갤러리 페레스프로젝트와 손잡고 작가의 독일 레지던시 활동이후 올 연말 밀라노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윤두현 갤러리 기체 대표는 “나이나 지역성을 탈피해 이야기를 구축하고 작업을 만드는 방식이 흥미롭다”면서 “작가의 관점에서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는 갤러리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 평소 작가가 점토로 빚던 입체 작품을 브론즈 등으로 바꾸는 등 새로운 시도를 도왔다.
임수영 큐레이터는 “유예림 작품의 모호함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라며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감각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고 평했다.
전시는 28일까지.
▷94년생 유예림 작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촘촘히 구축하고 생경한 이미지로 재해석해 내는데 능통한 작가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20년 첫 개인전을 갖고 이번에 3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두산갤러리(2022)와 상하이 펑크갤러리(2022)등 그룹전도 활발하다. 평범한 일상 같은 섬세하면서도 거친 붓질이 공존하고, 개성이 강한 이미지로 조형언어가 뚜렷하다.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생각한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시간의 축적과 알처럼 모호한 대상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과 샤넬코리아가 국내 신진·중견작가 6인을 선정한 ‘Now&Next’ 영상에도 소개됐다.
▷윤두현 갤러리 기체 대표는 국문학도 출신이지만 박여숙화랑과 영은미술관, 인터알리아 등에서 경력을 쌓은 후 2014년 갤러리 기체를 설립했다. 기체란 공기처럼 분명한 존재 이유와 특유의 유연성을 지닌 공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세대나 지역, 문화권을 폭넓게 가져가는 작가를 선호하고, 작품의 고유성을 함께 발전시켜 작품성과 시장성의 균형을 잘 갖춘 전업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둔다. 작가 입장에서 고민하고, 솔루션을 제시하는 갤러리가 되기 위해 대외협력 디렉터를 두고 국내외 다양한 공간과 미술계 전문가들과 협업해 나가는 플랫폼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8년 첫 개인전부터 함께 한 88년생 옥승철을 비롯해 유예림, 유지영, 이동혁, 장파 등을 전속작가로 두고 있고, 권현빈, 안옥현, 박노완, 칼란 그레시아, 리밍 등 국내외 작가들과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기체는 올해도 상해 거점의 갤러리 안테나 스페이스와 협력해 휴고보스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리밍(李明·37)과 권현빈 작가 2인전을 8월에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