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에 돈 감싸 건넨 상사…‘회식 성폭력’ 많다

이주빈 2023. 1. 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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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폭력, 빈틈을 비추다]

게티이미지뱅크
“회식을 할 때면 부장님은 ‘술은 여자가 따라야 한다’며 꼭 자기 옆은 전부 여자로 앉혔던 것 같다. 특히 술잔에 돈을 감싸서 나에게 건네기도 했다.”(보통 유흥업소 접객원에게 하는 행동)
“과장은 회사 동료들과 소규모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나에게 술 마시는 모습이 ‘섹시했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기사님, 근처에 숙소 많은 곳으로 가 주세요.’ 최 과장이 택시기사에게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직장성희롱성폭력예방센터가 지난달 말 발간한 ‘성희롱 없는 일터 만들기’ 수기집에 적혀 있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이 수기집엔 피해자가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입고 퇴사한 사례, 피해를 신고한 후 일자리를 잃은 사례 등이 담겨 있다. 총 24편의 수기 중 절반 가량이 회식 자리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을 담고 있다.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 상급자였다.

이처럼 회식 자리에서 성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4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작성한 ‘소셜 빅데이터를 이용한 조직문화 실태 탐색 및 정책 이슈 발굴’ 보고서를 보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회사생활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 성희롱과 관련한 글에서 ‘회식’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됐다. 이 보고서는 블라인드 이용자들이 2021년 8월1일부터 지난해 8월30일까지 해당 게시판에 회사 조직문화와 관련해서 남긴 글 2627개의 핵심어(열쇳말)를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희롱을 언급한 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핵심어 30개를 선정하고 사용 빈도를 순위로 매겼더니 ‘성희롱’ ‘회사’ ‘직원’ ‘남자’ ‘성추행’ ‘상사’가 차례로 1위부터 6위를 차지했다. ‘사무실’이라는 말은 17번째로 많이 사용됐다. 그런데 ‘회식’이라는 말도 20위를 차지할 만큼 사용 빈도 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를 쓴 김은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인지데이터센터 부연구위원은 “‘회식’이 상위 연관 키워드로 등장해 회식 자리에서의 성희롱 및 성추행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추론된다”고 밝혔다. 김 부연구위원은 이어 “(핵심어 간) 의미망 분석 결과, 특히 ‘성추행’, ‘상사’, ‘남자’ 키워드가 강하게 연결돼 있어 남성 상사에 의한 성추행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유추된다”고 분석했다.

업무 시간 이후라도, 회사 밖이라도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 관계 및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성폭력이 될 수 있다. 서울직장성희롱성폭력예방센터는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해서 ‘장소적으로 직장 내에서 시간적으로 업무 시간 중’ 일어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식, 워크숍, 출장, 외근 모두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다”며 “회식이 자리를 옮겨 계속된 경우, 일부 인원만 참여한 술자리인 경우, 회식 이후 귀가하는 과정도 업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회식 자리에 함께 있던 동료들이 가해 상황을 목격하고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에 2차 피해를 경험한다. ‘옐로우 애플’이라는 필명으로 수기를 쓴 ㄱ씨는 회식 때 술에 취한 부장이 ‘딸 같으니까 한 번 안아보자’며 신체 접촉을 한 일을 언급하며 “그날 나와 부장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떠오른다. 그들은 부장님의 그런 태도에 박수를 치며 공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저항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센터는 피해 당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더라도 직장 내 성폭력으로 신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거부 의사는 직장 내 성희롱의 판단 기준이 아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직급이 높은 사람이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거부 의사를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거부 의사 표현 여부는 직장 내 성희롱 판단 기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기록’이라고 했다. 당장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더라도 육하원칙에 따라 누가, 어떤 행위를 했으며, 그래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자세히 적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센터의 설명이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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