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다크투어' 사상 최악의 학살범 폴 포트 "내 양심 문제 없었다" [TV온에어]

최하나 기자 2023. 1. 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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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크투어'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가 반성없는 모습으로 공분을 샀다.

4일 밤 방송된 JTBC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3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의 흔적을 추적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했던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이 반성과 뉘우침 없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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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크투어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세계 다크투어’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가 반성없는 모습으로 공분을 샀다.

4일 밤 방송된 JTBC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3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의 흔적을 추적했다.

보파나와 시타의 러브 스토리다. 폴 포트의 폭정은 죄없는 사람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았다. 보파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여유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보파나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시타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부모님들의 허락 하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 론 놀 정부 집권으로 시타가 군대로 차출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시타는 승려가 됐다. 그 사이 보파나는 론 놀 정부군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됐다.

보파나는 아들을 낳은 뒤 프놈펜에서 근근히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1975년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보파나는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고된 삶에 지쳐가던 중 보파나는 시타와 재회했다.

시타는 승려가 아닌 크메르 루주의 군인으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애틋한 연애편지를 주고 받으며 못다한 사랑을 이어갔다.

폴 포트 정권에서 사랑은 금지였기 때문에 보파나와 시타는 편지에서 가명을 쓰며 편지를 보냈다. 위태로운 만남을 이어가던 보파나는 임신을 했고, 임신 상태에서도 강제 노역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아이를 유산했고, 시타는 보파나의 이동을 요청했다. 요청을 수상하게 여긴 마을 책임자가 크메르 루주에게 밀고했다. 가택 수색 끝에 편지와 보파나의 사진이 발견됐고, 시타는 체포됐다.

시타에 이어 보파나도 체포됐고, 두 사람은 S-21 수용소로 끌려갔다. S-21은 반역이 의심되는 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던 곳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총알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심한 고문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면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두는 등 고문의 수위는 잔혹했다.

시타와 보파나는 머그샷을 찍고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보파나는 독방에 갇혀 5개월이 넘도록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보파나는 자신이 미국 CSI 첩자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자백한 보파나는 1977년 3월 킬링필드에서 처형됐다. 시타도 보파나를 그리워 하다가 그녀와 같은 날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시타와 보파나 외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킬링필드. 승승장구할 것 같던 폴 포트 정부는 1979년 프놈펜이 베트남에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폴 포트는 정글로 도망쳐 크메르 루주와 함께 세력을 유지했다. 베트남 공격 이후 폴 포트는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 했다. 그러던 중 1997년 크메르 루주가 분열되기 시작됐다. 이에 폴 포트는 부하를 처형한 혐의로 인민 재판을 받았다.

1997년 7월 25일 폴 포트에게 대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폴 포트는 당시 "나는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폭력적인 사람 같아 보이냐. 내 양심과 사명에 관해서는 문제가 없었다”며 죄를 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폴 포트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가택 연금을 당했다. 폴 포트는 학살에 대한 사과는커녕 죗값도 받지 않은채 사망했다.

대학살에 가담한 주요 간부들은 어떻게 됐을까. 킬링필드가 끝나고 30년 후 재판이 열렸다. 키우 삼판은 2018년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 외 주범들은 노환으로 사망해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했던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이 반성과 뉘우침 없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JTBC ‘세계 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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