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혁신클러스터]② 아마존 러브콜 받고 다국적 제약사와 경쟁...K헬스케어 ‘작은 거인들’ 모여 산다
의료기기 스타트업 요람으로 탈바꿈
“교통·규제완화·정책 일관성이 성공 비결”
“기업이 오고 싶어하는 도시 만들 것”
#웨어러블 심전도 패치와 다중 환자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플랫폼을 개발·생산하는 ‘메쥬’의 박정환 대표는 해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전시회(CES) 참가하고 있다. 메쥬는 2018년 설립 후 매년 CES에 참가하고 있다. 올해도 행사에 참가했다. 지난해 행사에서는 미국 아마존으로부터 협력 방안을 논의하자는 러브콜을 받았다. 박 대표는 이르면 2분기 중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으면 미국 보스턴에 법인을 설립하겠다는 구상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시작한 국내 의료기기 스타트업의 해외 시장 공략이 본격화하는 것이다.
#국내 최초로 자가혈당관리 연속혈당 측정기를 개발·제조해 판매하는 아이센스는 지난 2007년 서울에서 강원도 원주 동화첨단의료기기단지에 둥지를 새로 틀었다. 로슈, 존슨앤드존슨, 바이엘, 애보트 등 다국적 제약사가 꽉 잡고 있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원주시는 교육훈련, 연구개발(R&D)지원 등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했다. 아이센스는 2013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고, 연 매출 20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회사 매출 80%는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나온다.
강원도 원주시가 국내 의료기기 기업 요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원주에서 창업해 지역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의료기기 업체부터 서울에서 이전해온 기업까지 170개에 이르는 기업체가 자리 잡았다. 지금도 새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해마다 30개 이상의 기업 문의가 이어진다. 기업들이 ‘가고 싶어하는 도시’라는 의미다. ‘군사도시’의 낡은 이미지를 벗기 위해 20년 이상 공들인 결과다.
국내 지방 바이오클러스터 단지들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원주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1998년부터 역대 시정의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과 서울 등 수도권과 이어지는 교통의 발달, 2019년 디지털헬스케어 규제특구 지정까지 ‘삼박자’가 고루 맞아떨어진 결과다. 지역 내 의료기기 특화 고등학교부터 연세대, 강릉원주대 등 12개 대학과 고교에서 양성한 약 1800명에 이르는 인력이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아이디어만 가져오라” 전주기 지원
서울 도심에서 차량으로 1시간 30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위치한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 지상 1층부터 10층까지 의료기기 기업 약 60개가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입주사들은 외부로 나갈 필요 없이 건물 내에서 의료기기 개발부터 인허가,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김홍삼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기술지원센터장은 “의료기기 기업이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컨설팅부터, 디자인·기구설계, 시제품 제작, 인허가 지원부터 마케팅·수출 지원에 이르기까지 전 주기에 걸쳐 지원한다”라며 “마케팅까지 지원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규모를 키워 센터 외부로 나간 기업도 언제든지 센터 내 설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실제 센터 내 시험실 내부는 입주사와 외부 기업 담당자로 붐비고 있었다. 김홍삼 센터장은 “중소기업들은 수천만원대 장비를 구매하기가 어렵고, 외부에서 시험을 진행하려면 가격도 만만치 않다”며 “10억원을 웃도는 장비는 물론, 수요조사를 진행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장비를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 100만~200만원에 이르는 설비 이용 가격을 3만~7만원에 제공했다.
센터를 거쳐 간 의료기기 기업은 지역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창업 기업으로는 ‘씨유메디칼시스템’, ‘메디아나’가 대표적이다. 씨유메디칼은 2001년 연구원 5명이 설립한 저출력심장충격기 기업으로 국내 시장 1위다. 지난해 기준 임직원은 100명을 넘었고, 매출은 300억원에 이른다. 1993년 연구원 2명이 창업한 메디아나도 국내 환자감시장치 1위를 기록 중이다. 임직원만 200명에 달하며 매출은 700억원 규모다. 씨유메디칼과 메디아나는 각각 2011년, 2014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기업들도 이미 여러 곳이 있다. 인공지능(AI) 기반의 심전도 패치를 개발하는 ‘메쥬’는 2021년 2억원대 매출이 1년 만인 2022년 25억원을 넘어섰다. 올해는 100억원을 목표로 한다. 박정환 메쥬 대표는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학사부터 석·박사까지 마친 지역 출신 인재다.
박 대표는 “국내서 심전도를 판독할 수 있는 전문의가 200명 규모밖에 안 되는데 대부분이 대학병원에만 있다. 일반 로컬에는 제대로 판독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라며 “강원도가 2019년 규제자유특구 사업자로 선정되면서 국내서는 처음으로 웨어러블 기기로 2000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필드 임상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와 대학 ‘맨바닥부터’ 시작, 수도권서도 찾는다
수도권에서 원주로 이주해 성장한 기업들도 있다. 센터 인근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의료기기 기업 ‘누가의료기’와 자가혈당측정기 기업 ‘아이센스’가 대표적이다. 2002년 설립된 누가의료기는 경기도 광주에서 2006년 원주로 이전한 기업이다. 지난해 기준 매출 275억원을 기록했다. 아이센스는 2007년 서울에서 원주로 옮겨와 매출 2000억원대 코스닥 상장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미국, 유럽은 물론, 인도에도 진출했다.
원주시는 1998년부터 부침을 겪으며 의료기기 산업 지원 방안을 고민해왔다. 당시 군사 도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맨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의지로 산업통상자원부의 테크노파크 사업에 도전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인프라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절치부심했다. 원주시는 연세대 등 3개 대학과 흥업면에 방치됐던 보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작은 사무실로 만들었다.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의 전신이다.
이후 1999년 제품 양산을 돕기 위해 부도난 기업을 원주시가 매입해 생산 입지를 갖췄다.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을 넘어서 전문가가 필요했다. 2003년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가 설립된 배경이다.
인터뷰 | 양명배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전략기획실장
양명배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전략기획실장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은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정책의 일관성을 꼽을 수 있다”며 “대부분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기존 정책이 폐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원주의 의료기기 산업은 장과 관계없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양 실장은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양 실장을 만나 테크노벨리의 성공 비결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의료기기테크노밸리 설립 배경은.
“2003년 설립됐지만 사실 1998년 처음 시작했다. 당시 원주는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를 벗기 위해 지역산업 육성 의지를 다지려는 가운데 지역 소재 연세대와 중앙 정부의 테크노파크 공모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원주에 인프라가 하나도 없다 보니 탈락했다. 그때 포기했으면 지금이 없다. 중앙 정부 도움 없이 자생적 모델 만들어보자는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시골 마을의 보건소를 리모델링해 10개 공간을 만들어 10개 기업을 대상으로 의료기기 창업 보육센터를 열었다. 이 중 1개 기업(메디아나)은 코스닥에 상장했다. 보육만 하다 보니 제품 양산을 도울 수 없었다. 1999년 지역 내 배터리 만드는 회사가 부도가 나서 매물로 나왔다. 원주시는 해당 기업의 부지를 매입해 생산 입지를 만들었다. 2001년 국내 최초로 심장충격기를 개발한 씨유메디컬시스템도 여기를 거쳤다. 창업부터 양산까지 이제는 공무원이 할 단계를 넘어서 전문가가 필요했다. 테크노밸리 설립 과정이다.”
-주로 어느 분야에 집중하는지 궁금하다.
“센터는 원장과 2실 1본부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직원이 기업지원본부에 집중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증 업무를 가장 까다로워한다. 의료기기 전공자와 연구소 경력을 보유한 인재를 투입해 지원하고 있으며 인허가 경험 인재를 훈련하고 양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의 원주규제지원센터 설립도 끌어냈다. 기존에는 기업들이 인증 관련해서 서울이나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가야 했는데,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7월부터 1년 정도 운영했는데 50개 기업이 90건에 달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최근 정부의 공공기관 감축 정책에 따라 규제지원센터 인원도 줄이려고 하고 있다. 좀 더 인원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축소한다니 당황스러운 상태다.”
-테크노밸리의 역할은.
“창업보육부터 교육훈련, 마케팅지원에 이르기까지 전 주기에 걸쳐 지원한다. 원스톱 토탈 솔루션으로 이해하면 된다. 창업 초기 기업이 스케치만 들고 와도 설계해준다. 비규격 제품은 우리 직원들이 직접 만들어주기도 한다. 제품 안전성, 시험 검사도 해준다. 제품을 팔기 위한 허가 지원도 한다. 제품 개발 단계부터 기술자 붙여 제품 완성도를 높여 한 번에 허가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사전 시험 인증 기관보다 더 보수적으로 시험을 하기 때문에 우리 기관을 활용하면 통과 확률이 훨씬 높다. 가장 큰 장점은 마케팅이다.”
-2021년 기준 원주 지역 의료기기 기업 매출이 전년대비 40% 이상 성장한 8800억원을 기록했다. 성장 배경은.
“원주는 클러스터가 잘 조성돼있다. 36만 작은 도시이지만 시너지가 좋다. 세브란스병원이 있어 상급병원이라 임상 조건도 좋다. 12개 대학에서 1년에 1800명의 인력이 양성된다. 원주가 지금까지 20년 넘게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정책 일관성이 가장 주효했다. 대부분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앞 정책이 폐기되던데 어떤 당의 시장이 당선돼도 의료기기 지원 산업을 지속해서 강화해왔다. 시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2020년과 2021년, 2022년은 코로나19 효과가 반영됐다. 5년 내 매출 1조원을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역 대표 기업을 꼽는다면.
“수도권에서 창업해 2006년 원주로 이전한 누가의료기기와 함께 2007년 이전한 아이센스도 있다. 지역 내에서 성장하고 있는 기업은 디지털헬스케어 기업으로 성장 중인 메쥬를 꼽을 수 있다. 2021년 2억원대 매출이 올해 25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는데 달성한 매출이다. 내년 100억원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문은.
“원주는 의료기기 산업을 가장 먼저 육성하기 시작한 도시다. 강원특별자치도법 통과 후 디지털헬스케어 분야 규제를 타파하며 기업 하기 좋은 의료기기, 사업하기 좋은 도시 만드는 게 목표다. 국내 의료기기 시장은 너무 작다. 결국 수출인데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특별자치도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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