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경제·안보가 하나인 시대, 美의 공급망 재편은 우리에게 기회다
국제경제학 권위자였던 찰스 킨들버거 교수의 역작 ‘경제 강대국 흥망사’는 국가의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면 영속할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국가는 늙고 병들고 소멸한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와 죽고 사는 문제인 안보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된 경제안보 시대에는 생로병사의 주기가 한층 짧아질지도 모른다. 가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 체제가 종식된 1950년대 이후 경제와 안보의 관계는 자유주의적 시장가치를 중시하며 상품·자본·사람의 이동과 교류에 대한 제한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세계화와 함께 글로벌 공급망 확대를 통해 국가 간 상호의존성과 초연결성이 증대되면서 경제와 안보의 연계 형태가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경제 성장을 견인해온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상호의존성의 ‘무기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경제적 효율성의 원천이었던 국가 간 경제적 상호 의존이 이제 역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수단이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각국의 대외정책은 시장의 효율보다 가치에 기반한 신뢰와 안정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은 경쟁국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적 통치술로서 기존의 수입규제 및 수출통제 등의 통상정책뿐만 아니라 투자규제, 공급망 재편, 산업 육성 등 더 근원적인 경제안보 정책을 추진 중이다. 특히 미·중 갈등은 경제를 넘어 안보와 이념으로 확대되고, 분야도 단순한 무역에서 기술변화와 통화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이웃 일본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대외정책을 통해 자국의 경제안보를 위한 국제협력과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중국 또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을 신청한 데 이어, 최근에는 글로벌개발구상과 글로벌안보구상을 발표하면서 역내에 경제적 관여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호주, 영국, EU도 각자의 전략과 정책을 발전시켜 다각적인 협력과 연대를 추진 중이다. 우리의 외교정책 기조도 주요국 대외정책의 패러다임 변화에 발맞춰 경제안보 관점에서 재편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안보 강화를 위한 공급원의 다변화 등 보편적인 접근 방식과 함께 아시아 지역 공급망 강화 등 우리의 상황에 맞는 특수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다행히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정책은 동맹국 및 우방국과의 공조를 전제하므로, 중국의 추격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우리 산업과 기업에는 기회일 수도 있다. 보조금 규제를 약화시키는 추세도, 미래 산업 육성을 목표로 보조금 정책이 필요한 우리 처지에서는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현재 미국 주도로 타진되고 있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는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 블록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며, 미국은 이를 통해 디지털, 환경, 노동 분야를 포괄하는 새로운 무역규범을 수립하려 할 것이다. 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무역의존도가 경제적 자립도에 비해 매우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기본적으로 비차별적인 무역자유화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다자무역체제 회복이 가장 바람직하나, 현재로서는 미국이 추진하는 새로운 소다자적 형태의 무역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특히 우리는 그동안 규범 수립을 주도하는 국가가 아니었으나, 이 기회에 디지털 경제 및 인프라·공급망 분야의 새로운 규범 수립 과정에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외 영향력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정부가 모든 외교의 중심을 경제에 놓고, 안보와 산업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수출 전략을 모색하여 세계적인 복합위기를 돌파하려는 정책방향을 밝힌 것은 시의적절하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에 근원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경제안보 시대에는 패자부활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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