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근래 소설에서 읽은 가장 섬뜩한 장면. “원하는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집을 팔겠다는 집주인의 통보를 받고는 주변의 이사 소식에 민감해지는 40대 부부. 독서 교습으로 가르치던 학생이 옆동네로 이사 간다는 이야기에 곧장 “자가래?”라고 묻는 남편에게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 아내는 짐짓 시간여행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집주인이 우리한테 조금 더 대출받아 이 집 사라 했을 때. 아니, 비트코인이나 주식이 훨씬 나았으려나?”라는 대답에 아내의 수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가 살아있던 때가 아니라, 기껏 지금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때라고? 정말 진심일까봐 아내는 더 묻지 못한다. 김애란의 ‘좋은 이웃’(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의 한 대목이다.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고 가끔은 기부도 하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자의식으로 살아왔던 부부는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앞에서 내면의 무언가가 조금씩 무너진다. 자신이 베풀고 있다고 여겼던 장애 학생이 더 좋은 아파트에 자가로 이사 간다는 소식에는 속이 뒤틀리고,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쥔 게 있는 세대라며 자위하다가도 자신보다 돈 많은 신입 앞에서는 무슨 조언을 하기도 멋쩍어지며, 공동체·이웃·연대라는 개념을 가르치다가도 “선생님은 다 믿어요? 이 책에 있는 말들”이라는 학생의 물음에 당황을 숨기지 못한다. 이것은 단지 집값에 목매는 중산층 중년 부부의 세대적·계급적 고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속물이 되어버렸다는 반성과 자조가 아니라, 어디까지가 속물이고 아닌지를 알 수 없어졌다는 시대적 불안. 기본 욕구와 탐욕, 생존과 투기 사이에서 길을 잃은 시대에 선악의 경계는 일상에서 얼마나 쉽게 녹아 없어지는지. 늘 그렇듯 김애란 소설의 윤리적인 딜레마는 시대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건드린다.
그런데 선악이라니, 유난스러운 말로 들린다면 이 감각 역시 시대적 정동일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첫 세대로서 수도권 정비사업, 무허가 주택단지 철거 명령, 신축 아파트 분양을 처음으로 목도했던 조세희 작가는 <난장이를 쏘아올린 작은 공>의 집필 계기에 대해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세입자 가족과 식사를 하다가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오던 철거반과 싸우고 돌아오는 길에 샀던 작은 노트가 ‘난장이 연작’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한국현대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은 읽기 어려운 지식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빈부를 이분적인 선악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그러나 어느 연구자의 말을 빌리면 그 선악의 이분법 안에는 “부에 대한 동경과 경원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공존”(정주아)하고 있다는 냉정한 통찰이, 그리고 현실이 그토록 삼엄하고 비참할 때조차 “따뜻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긴 것이기도 하다. 김애란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는 우연히 20여년 전 남편이 연필로 밑줄 그은 <난쏘공>의 한 문장을 천천히 읽고는 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부동산 시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이동권 시위, 반지하 주택 철거 등을 둘러싸고 여전히 ‘약자’와 ‘더 약자’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에 귀 기울이면서도 고집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했던, 지난달 영면한 작가의 전언은 반세기가 지난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묵직하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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