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의 사이시옷] 대통령이 외롭기를 바란다

정유진 기자 2023. 1.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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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를 예고 없이 방문했다. 우리에게 대통령이 방문하는 ‘격전지’란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선거 지역구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젤렌스키가 방문한 격전지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이다.

정유진 국제부장

러시아는 와그너 용병은 물론 감옥에 수감 중이던 죄수들까지 바흐무트 전투에 대거 투입했다. 우크라이나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나 목격할 수 있었던 참호전까지 불사하며 결사 항전 중이다. 전쟁을 거치며 바흐무트의 인구는 7만여명에서 1만여명으로 줄어들었고, 지금도 하루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바흐무트를 찾은 젤렌스키의 용감함이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대통령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까지 갔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공개된 당시 영상을 보면 젤렌스키는 병사들에게 메달을 수여하면서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의 명령에 따라 사지에서 싸우다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들의 얼굴을,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하려는 것처럼.

미드 <지정 생존자>에는 ‘얼굴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드라마는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과 주요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바람에 별 볼 일 없던 대학교수 출신 장관이 하루아침에 미국 대통령이 된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닳고 닳은 정치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이전 대통령들이 하지 않았던 작은 부분까지 신경쓴다. 예를 들면 테러범 생포 지시를 내리면서 작전에 투입될 대원들을 미리 찾아가 격려와 감사를 전하는 것.

작전은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현장 지휘관인 맥스가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직 대통령이 그에게 조언을 한다.

“나사르 생포 작전 직전에 네이비실을 방문했다지요? 훌륭한 생각이지만 그런 행동엔 대가가 따르지요. 내 결정으로 인해 죽은 이의 얼굴을 안다는 건.”

“지휘관이 사망했습니다. 매일 맥스와 그의 가족을 생각합니다.”

“최고사령관(대통령)은 단순한 직함이 아니요. 책임이지요. 끔찍한 책임. 이제 누굴 살리고 죽일 건지 결정할 힘을 지닌 거요.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이지요.”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윤석열 대통령도 지금 몹시 외로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외로움이란 결국 자신이 지닌 힘의 ‘끔찍한 책임’을 매 순간 각성하고, 그 힘으로도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할까봐 매 순간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윤 대통령이 안전 정책을 결정할 때 평생 자식 잃은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기 바라며, 주거 정책을 결정할 때는 지난해 여름 집안에서 익사한 서울 신림동 반지하 일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기 바란다. 장애인 정책을 결정할 때는 발달장애가 있는 6세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몸을 던진 40대 어머니를 떠올리기 바라며, 산업안전 정책을 결정할 때는 안전기준에 미달한 소스배합기에 몸이 끼여 사망한 SPC의 20대 직원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리고 화물 운임 정책을 결정할 때는 하루 16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화물 기사와, 무사귀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기도하는 그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기 바란다.

만약 대통령의 머릿속이 ‘우리 편’인 여당 정치인과 ‘남의 편’인 야당 정치인의 얼굴로 이미 가득 차서, 저 얼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해 손쉬운 ‘묶음’으로 처리된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현실은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이들 하나하나가 ‘노동세력’ ‘장애인세력’ 같은, 얼굴을 갖지 못한 세력으로 치환됨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인 현실에서 터져나온 절규들은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정치적 투쟁의 판 속에서 “북핵과 다를 바 없는 위협”이라는 비유적 삽화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결정이 언제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다보면 누군가의 기대를 온전히 채워주지 못해 실망케 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실망할 그들의 얼굴까지도 매일 떠올려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대통령은 타협해야 하는 것과 타협해선 안 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끔찍한 책임을 지고 가야 할,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이라는 대통령의 무게다.

정유진 국제부장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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