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삶의 상수,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보편성은 있죠

기자 2023. 1.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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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연필과 컴퍼스로 원을 그리자. 원의 크기는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도 원의 둘레를 재서 지름으로 나누면 누구나 똑같은 원주율 파이(π) 값을 얻는다. 길이를 재는 단위로 ㎝를 쓰든 우리나라의 전통 단위인 자를 쓰든 마찬가지다. 원의 지름이 변수라면 원주율 파이는 상수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박경미의 <수학 비타민>에 초코파이에 들어있는 초코의 함량을 구하는 재밌는 계산이 나온다. 초코의 함량비를 ‘초코/초코파이’의 분수로 적고 ‘초코’를 약분하면 1/파이가 된다. 원주율 파이의 값 3.141592...를 넣어 계산하면, 초코파이 안 초코의 함량비율이 약 32%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같은 계산을 확장해 애플파이에 들어있는 애플의 함량을 구하면 이것도 32%다. 전 세계 어디서나 A파이에 들어있는 A의 함량이 약 32%로 같은 이유는 지구 어디서나 파이(π)의 값이 똑같기 때문이다. 외계인도 파이를 먹는다면 외계인의 X파이에 들어있는 X의 함량도 32%다. 우주 어디서나 π 값이 같기 때문이다.

재밌는 수학 농담일 뿐 말도 안 되는 계산이고 주장이다. 하지만, 우주 어디서나 원주율π의 값이 같은지는 의미 있는 질문이다. 그려놓고 몇 도의 각도를 회전해도, 전혀 모습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도형이 원이다. 외계인의 수학 실력이 우리 정도만 되어도, 2차원 평면에서 연속적인 회전대칭성을 가진 유일한 도형인 원을 모를 리 없고, 그렇다면 이들도 우리와 정확히 같은 π 값을 알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수학의 상수 π는 우주 공통이다.

중력상수 G, 빛의 속도 c, 그리고 플랑크 상수 h 따위는 물리학의 상수다. π 같은 수학의 상수는 우주적인 규모의 보편성을 가질 것이 분명하지만, 물리학의 상수가 우주 어디서나 같은지는 재봐야 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이 지금 이곳과 같은지는 망원경으로 저 먼 우주를 살피면 알 수 있다. 빛의 속도는 유한해서, 더 먼 곳을 볼수록 우리는 더 오래전 과거를 보게 되니, 천체망원경은 과거를 보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많은 측정과 관찰 결과는, 우주 안 언제 어디서나 물리학의 기본 상수가 일정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길이, 시간, 질량의 단위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보편성을 갖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미터법이 제안되어 여러 나라에 받아들여졌다. 척도와 단위의 보편성은 보편적 인권 개념과 함께 태어난 셈이다. 길이의 단위는 지구의 크기를, 시간의 단위는 지구의 태양 공전을 기준으로 하자고 약속했다. 또 질량의 단위는 지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을 기준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약속한 다음에는, 1m와 1㎏에 해당하는 표준원기를 만들어 프랑스 파리에 보관하게 되었다. 미터법의 등장으로 지구라는 규모 안에서 단위들이 보편성을 갖게 되었지만, 궁금하면 파리에 직접 가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인류의 역사에서 단위와 척도의 발전사는 보편성의 확장과 함께했다. 고대 왕국의 도량형 통일은 한 국가 안에서의 보편성이 목표였다. “지구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단위”를 추구한 미터법의 시행으로 보편성의 범위는 개별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다음 목표는 물론, “우주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단위”를 추구하는 우주적 규모의 보편성이다. 2019년 드디어 모든 국제 표준 기본 단위가 물리학의 보편적인 기본 상수를 기준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제 이 작은 지구에서 우리 인류가 사용하는 물리학의 단위가 우주적인 규모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어, 드디어 우리 인간이 우주적인 규모의 물리학 학술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고나 할까.

우리 각자의 삶에도 변수와 상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꼭 지켜야 할 삶의 상수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만족해야 할 보편성이 있다. 나와 너의 위치를 바꿔도 여전히 성립하는 것만이 삶의 상수로서 자격이 있다. 자유와 인권, 평등과 공정 등이 지구 위 우리 모두의 삶의 상수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의 표준 단위처럼, 외계인에게도 타당한 우주적 규모의 보편성을 가진 삶의 상수는 무얼까? 지속과 평화 말고 다른 것은 내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주적 규모의 보편 지성의 눈에, 싸우고 죽이며 지속 가능성을 해치고 있는, 창백한 푸른 점 위 우리 인간은 얼마나 기이해 보일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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