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다크투어'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종합]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세계 다크투어’ 사상 최악의 학살, 킬링필드에 대해 조명했다.
4일 밤 방송된 JTBC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3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의 흔적을 추적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는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공산주의만이 캄보디아를 유토피아로 만들어줄 거라 믿었다. 폴 포트는 크메르 루즈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정치 야망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전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큰 위기에 빠졌다. 시아누크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 북베트남은 베트콩을 지원할 보급로가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통해 지원 물자를 운송했다. 이는 호찌민 루트로, 미국은 호찌민 루트를 공격하겠다며 선포했다.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 공습을 감행했고, 네이탄팜까지 사용했다. 계속된 공격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캄보디아 국민들의 반발이 커졌고, 이 틈을 타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론 놀은 시아누크를 몰아내고 새로운 캄보디아 지도자고 됐고, 친미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미국의 공격은 계속됐다. 론 놀 집권 이후에도 3년 간 공습이 이어졌고, 전체 농토의 80%가 황폐화됐다.
피난민들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이동해서 난민 생활을 했다. 반면 론 놀 정부는 미국과 손잡고 거액을 받았다. 국민은 외면하고 호의호식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는 론 놀 정부와 내전을 벌였다. 론 놀 정부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크메르 루주를 환영했다.
미군이 패배한체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친미였던 론 놀 정부는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좌익 무장단체였던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던 시아누크가 잠시 정권을 잡았지만, 이내 폴 포트가 정권을 잡게 됐다. 캄보디아에 평화가 찾아왔을까. 크메르 르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던 날 국민들은 새 정권을 환영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도시를 청소하고 재정비하겠다는 명분 하에 론 놀 정부의 잔재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론 놀 정부 관련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또한 프놈펜 시민들은 크메르 루주에 의해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 결과 수도 프놈펜은 유령도시가 되고 말았다. 내쫓긴 사람들은 강제 이동 속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임용한 다크가이드는 “폴 포트는 도시를 없애려고 했다”고 말했다.
프놈펜을 장악한 폴 포트는 자신이 집권한 1975년을 0년으로 명명하고, 모든 걸 원년으로 만드려고 했다.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을 노동자 계급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려 했다. 외국 문물에 물든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폴 포트는 순수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친족까지 살해했다. 자본주의와 문명에 물든 자들을 싹쓸이 하려한 것이다. 또한 탐욕을 부르는 요건을 제거하기 위해 모두 다 가난해야한다고 했다. 세 번째 조건은 아이들을 순수 프롤레타리아로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크메르 루주는 국민들에게 농사를 강요했고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임산부,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심지어 환자들도 농촌으로 떠나야 했다.
이후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단 농장을 비롯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개혁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매일 같이 집단 농장에서 일을 해야했다. 그야말로 벽 없는 감옥이었다. 지옥 같은 노동의 결과는 실패였다. 굶주림에 시달린 채 노동을 하다 보니 사망자가 속출했다. 무엇 보다 탄압이 아무리 강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노예는 자유농민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걸 간과한 결과다. 목표 달성 실패로 농장 감독관들은 처벌이 두려웠고,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에 부풀린 생산량에 맞춰 세금이 부과됐고, 국민들이 먹을 식량은 더욱 없어졌다.
폴 포트의 극단적인 공산화로 인해 사유 재산이 금지되고 국가가 국민에게 쌀을 지급했다. 물물교환도 금지했다. 누구도 좋은 옷을 입으면 안되기 때문에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집단 생활을 해야했다. 폴 포트는 본인을 내세워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반역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가뒀고, 잔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사망자가 증가하자 전염병을 우려해 수용소 주변으로 민간인들을 끌고 가 집단 학살했다. 사망자들을 묻는 곳은 킬링필드가 됐고, 현재까지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킬링필드만 300곳 이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으로 몰고 간 S-21 수용소는 현재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수용소 내부에는 수감자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마당에는 기둥과 항아리가 있었는데, 이는 교수대와 물고문에 이용됐던 항아리였다. 수용소 한편에는 수용소 첫 발견 당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옥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12명이었다.
S-21 수용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수가맞들의 집단 매장지 킬링 필드가 있었다. 발견 당시 수습한 유골만 9000구였다. 근처에서 발견된 매장지만 40개 이상이었다. 이곳에는 억울한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이 있었다. 위령탑은 사실 거대한 유골탑이었다. 이 매장지에서 발견된 약 5000명의 유골이 보관돼 있다. 유골에는 폭행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고 노환으로 사망하거나 킬링필드 사건 발생 30년 이후 허울 뿐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킬링필드의 여파는 캄보디아에서 계속되고 있다. 캄보딘아는 베트남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전역이 지뢰 지역이 됐다. 약 500만 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 피해는 민간인의 몫이 됐다. 지뢰 폭발로 인해 2만 명이 사망하고 4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뢰 대응센터를 구축하고 지뢰 제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또 있다. 킬링필드로 발생한 이산가족이다. 이에 캄보디아에서는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을 통해 1200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재회했다.
30년도 아닌 3년의 폭정으로 인한 피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든 국가의 기초는 교육에서 시작되는데, 폴 포트의 폭정으로 캄보디아 지식인이 거의 몰살 당했다. 이에 교육이 붕괴되고 문화유산이 유실됐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JTBC ‘세계 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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