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핑크폰
두 전화기 사이의 거리는 40m가 채 되지 않는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점 남측지역 내 유엔군사령부 일직장교(JDO) 사무실과 북측 판문각에 놓인 전화기다. 양측은 오전 9시30분 업무 개시를 위해, 오후 3시30분 업무 마감을 위해 하루 두 번 통화한다. JDO 사무실은 유엔사와 북한 간 공식 사항을 주고받기 위해 24시간 상시 근무 체제로 운영된다. 정전협정 체결 2년 전인 1951년 설치됐다.
JDO 사무실에 놓인 직통전화의 별칭은 ‘핑크폰’이다. 요즘 집이나 사무실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구식 전화기인데 밝은 분홍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2년 설치됐으니 20년이 넘었다. 하루 두 차례 정례 통화는 기기의 정상 작동 여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어서 통화 시간은 길지 않다. 그래도 자주 목소리를 확인하다 보니 간간이 사적인 얘기도 섞이는 모양이다. 유엔사의 한 장교는 2019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북한군 파트너와 메이저리그 야구팀,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소개했다. 북측 파트너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말해줬다고 한다.
핑크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북한이 2013년 정전협정 무효를 선언하면서 끊겼다가 2018년 7월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 복구됐다. 북측이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유엔사 장교가 군사분계선 근처로 가 확성기를 들고 육성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유엔사는 지난해 핑크폰을 이용해 98건의 통지문을 북측에 전달했다고 4일 밝혔다. 전화선은 지난 한 해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24시간 유지됐다고 한다.
판문점을 경유하는 남북 직통전화는 총 33회선이다. 군은 서해지구와 동해지구, 서해상 우발충돌 방지용 등 별도로 통신선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채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 필요한 것은 그 채널을 통해 오가는 통화의 내용이다. 남북관계가 악화된 이후 형식적인 업무 개시·마감 통화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마저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긴장 고조 상황에서 불통되기 일쑤다. 지난 연말부터 남북 정상이 직접 나서 격한 말을 주고받고 있다. 남북은 물론 북·미 간 접촉 채널까지 다 끊어진 상태라고 한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맞아 남북 간 ‘핑크빛 반전’을 기대하는 건 정녕 무리일까.
안홍욱 논설위원 a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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