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굴복하지 않고, 화해했다는 소식 [정명원 검사의 소소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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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17년 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누군가 꿈꾸던 미래에서 이제 현재가 된 2023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몇 번이나 불행의 악다구니 속에 서 있을 테지만 그 어느 지점에서 기적적으로 진정한 화해가 이뤄졌다는 소식을 몇 번쯤 들을 수 있다면 제법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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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7년 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미래세계' 2023년에도 이어지는 수많은 불행과 좌절들
고소와 고발, 재판과 처벌로 불행의 끝을 보려는 사람들
불행에 맞서 이뤄낸 진정한 화해는 2023년의 희망사항
무려 2023년이다. 어린 시절 즐겨 봤던 만화영화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의 영향으로 우리 세대의 상상 속 미래는 2020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만화영화 속에 그려진,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던 2020년대는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우주전쟁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초미래적인 모습이었다. 날아다니기는커녕 여전히 꽉 막힌 도로에서 초조한 출근시간을 다투는 상황도, 전 인류가 마스크를 둘러쓰고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장면도, 우주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지구인들끼리 대포를 쏘며 지하 방공호에 숨어야 하는 현실도 우리의 상상 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변화한다 싶다가도, 잠시만 고개를 들어 과거 우리가 상상하던 미래 세계에 대입해 보면 지난 세기의 불행들이 형태를 조금 바꾸어 변주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2020년대가 2023년에 이르렀다 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한 해가 펼쳐지지 않겠냐는 원더키디 세대식 비관론에 빠져 있을 때쯤 '2023년에 당신이 마주하고 싶은 장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이 갇히지 않는, 속수무책의 죽음이 없는, 일하는 곳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막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퍼트려 장사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날아가는 무기들의 굉음, 타인의 불행을 흘끔거리는 관음,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피땀까지 짜 내어 가는 범죄들이 사라진, 일자리를 찾는 다급한 젊은이들이 보이스피싱 수거책이 되지 않는….
익히 알고 있는 불행의 목록들을 줄줄이 쓰다가 이런 방식의 희망은 너무 멀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마땅히 사라져야 할 수많은 불행들을 헤치고 떠올릴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희망이 필요하다. 오래 고민한 끝에 '화해했다는 소식'이라고 적는다.
불행의 목록을 들고 검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결연한 얼굴로 '끝까지 가겠다'고 말한다. 끝까지 가는 자의 얼굴을 많이 보아 온 탓인지 분쟁을 향해 서 있는 인간을 설득해 그 반대 방향으로 돌려세우기란 정말 어려운 일임을 안다. 누군가의 생을 잠식하는 깡마른 불행 앞에 용서나 화해를 들먹일 염치가 나에게는 없고 그렇다면 그저 끝까지 가보는 것도 불행에 처한 자의 권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소와 고발, 재판과 처벌로 이르게 되는 끝에서도 완전한 해방에는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불행을 마주한 자와 불행을 청소하는 역할을 맡은 나로서는 끝까지 가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끝장을 향한 메마른 과정 중에 돌연 화해에 이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진정한 화해는 얼마간의 합의금 절충 같은 것으로는 오지 않는다. 불행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는 상태지만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의지의 작용으로 화해는 이뤄진다. 오직 분쟁의 중심으로만 향하던 걸음을 문득 돌려세우고 서로의 어깨너머로 불행 이후의 무엇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불행을 소거하지 못하지만 불행에 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존하는 불행에 대항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로 '화해'가 있다. 그 위대한 것을 이뤄 낼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아예 절망하지는 않게 한다.
누군가 꿈꾸던 미래에서 이제 현재가 된 2023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몇 번이나 불행의 악다구니 속에 서 있을 테지만 그 어느 지점에서 기적적으로 진정한 화해가 이뤄졌다는 소식을 몇 번쯤 들을 수 있다면 제법 괜찮지 않을까. 지난한 비관론을 털고 일어나 2023년의 희망을 꿈꾸어본다.
정명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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