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도 나이도 안 따져, ‘情’으로 도전한 공동홈···이웃, 식구가 되다[반려시대, 누구랑 사세요?②]
옥천군 상삼리 ‘고독 퇴치’ 프로젝트
“혼자서는 이렇게는 못 살쥬.”
분홍색 신형 냉장고 양쪽 칸에는 식재료가 빽빽이 들어찼다. 제철 맞은 귤과 한과도 한 바구니 있다.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는 동나기 직전이다. 문짝은 피곤할 때 한 병씩 들이켜는 자양강장제 자리다. 바로 옆 김치냉장고에는 김장김치가 숨쉰다. 식탁 위엔 포슬포슬하게 찐 밤고구마가 손길을 기다린다. 하늘빛 타일로 꾸민 ‘왕언니’ 여예자씨(86)의 부엌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복숭아밭이 반기는 충북 옥천군 상삼마을. 이웃동네 영동에서 나고 자란 여씨는 열아홉에 이곳으로 시집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딸 셋에 아들 둘, 오남매를 길렀다. 자식들이 장성하면서 시골집 밥상에 올라오는 수저도 하나둘 줄었다. 미운 정 고운 정 든 남편은 20년 전 폐암으로 일흔 일곱에 세상을 떴다. 여씨는 “옛날엔 참깨, 들깨 농사도 하고 배추도 깔고 했다. 이제는 늙어서 농사도 내 손으로 못 짓는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오전 5시면 잠에서 깬다. 귀도, 무릎도 성치 않다. 하지만 지난 1년 새 노인정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치매 예방 차원에서 꼬박꼬박 한다는 10원내기 화투도 더 할 맛이 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마을에 문을 연 ‘공동생활홈’의 1호 입주자가 됐다. 지금은 동생 같은 여성 노인 3명과 같이 산다. 지난달 12일 상삼리를 찾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반려 존재가 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씨는 하루 종일 훈훈한 온기가 도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삼시 세끼 해먹는 재미는 덤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난방비가 얼마나 큰데요. 농촌 집들 가 앉아있으면 무릎팍 시려워. 여기선 이렇게 여럿이 얘기도 하고 얼마나 좋아유.”
이웃, 식구가 되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에 따른 중·노년 1인 가구 증가는 더 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21년 전체 사망자의 1%, 3378명이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나 뒤늦게 발견됐다.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한 어르신이 마을회관에 며칠 안 나오셨어. 맨날 얼굴 비쳤는데 이상하다 싶어 이장님이 담 넘어서 가본 거여. 근데 이미 돌아가신 거지.” 공동생활홈 멤버이자 마을 노인회장인 정종숙씨(71)는 상삼리 역시 고독사를 피해가지 못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로 집에만 있다보니 치매 증상이 심해진 어르신들도 있다고 한다. 공동생활홈은 홀몸노인 문제를 맞닥뜨린 마을이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대안이다.
대전에서 살던 정씨는 6년 전 상삼리에 놀러왔다가 맑은 공기와 넉넉한 인심에 눌러앉았다. 이웃들은 묵을 쒔다고, 농작물을 수확했다고 문을 두드렸다. 한평생 도시에서 산 정씨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어느덧 마을 살림꾼이 된 정씨는 자연스레 공동생활홈에 합류했다.
공동생활홈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홀몸노인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주거 모델이다. 2014~2015년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 고령자 공동시설 지원 시범사업’을 벌여 공동생활홈의 긍정적 효과를 확인했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공동생활홈 건립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은 상삼리가 2019년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 공모에 신청해 나온 결과물이다.
총 5억원을 지원받아 땅을 사고 단층집을 지었다. 널찍한 거실과 부엌 양옆으로는 2인1실짜리 방 4개와 화장실 3개, 다용도실이 있다. 정원 8명 중 딱 절반이 찼다. 공동체 생활을 주저해 입주를 결정하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다고 한다. 난방비, 수도요금 등은 상수원보호구역인 마을에 지원되는 금강수계기금으로 충당한다. 정부 지원에 기대기보다는 마을이 자생하는 방향을 추구한다.
먹거리 준비는 입주민들 몫이다. 각자 농사를 조금이라도 짓다보니 식재료는 차고 넘친다. 읍내를 나가는 날엔 콩나물 한 봉지라도 손에 들고 온다. 한집에서 산 지 1년이 넘다보니 각자 입맛도 꿰뚫고 있다. 정씨는 “우리집 사람들은 국수 삶아먹자, 라면 삶아먹자, 볶음밥 해먹자, 오늘은 나가서 먹자…. 아주 잘 맞는다”고 말했다. 왕언니 여씨도 동생들 취향을 잘 안다. “족발들을 좋아하니께. 어쩌다 장에 가면 사다주지.”
여씨는 ‘이 구역의 요리왕’으로 통한다. 정씨는 “왕언니가 호박전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여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같이 있으니까 심심하지도 않고 좋아요. 이렇게 좋은 데가 있는가. 약도 챙겨주죠, 염색도 해주죠, 파스 붙여주죠. 내 집 식구잖아요. 매느리도, 자식도 누가 그렇게 햐.”
막내 이춘자씨(68)는 대전에서 이곳으로 터를 옮긴 지 벌써 20년이 됐다. 상삼리 ‘준토박이’ 정도 되는 셈이다. 여럿이 함께 사니 가장 좋은 점은 아플 때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혼자 시름시름 앓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서럽다. “물 한 모금 떠다줄 사람도 없으니 눈물만 나죠. 이제 공동생활을 하니 의지가 되잖아요. 누가 아프면 병원에 연락도 해줄 수 있고 아프면 죽도 끓여줄 수 있고요.” 불면증을 앓는 그에게 상삼리 언니들은 꼬박꼬박 약을 먹었냐고 묻는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녹는다. 이씨의 세 자녀도 어머니 걱정을 덜었다. 옆에 있던 여씨도 “여기 있으니까 아이들도 맘을 놓고 전화를 안 한다”며 웃었다.
정씨는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발벗고 나선다. 직접 차를 몰고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퇴원하는 날에도 운전기사를 자처한다. 정씨는 “이런 게 서로 돕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만약 내가 몸이 안 좋으면 왕언니가 눌은 밥이라도 끓여준다”고 말했다.
작은 시골마을에도 각자의 삶이 있다. 하지만 한집에 살며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커피 한잔에 살아온 얘기, 손주 얘기, 먼저 간 남편 얘기가 오간다. 아랫마을 사는 딸을 따라 상삼리에 정착하게 됐다는 김재분씨(68)는 공동생활홈은 ‘쉼’이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주로 낮에는 딸네 집 가서 손주들 밥을 챙겨주고 오후에 온다”며 “남들은 노인정도 가고 하는데, 난 여기서 쉬는 게 가장 좋다. 참 편안하다”고 말했다.
반려에도 ‘상상’이 필요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살아온 배경도, 나이대도 다르다. 그런데도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전통적 가족 개념으로는 포섭하기 힘든 개인들 간의 공존은 새로운 반려문화의 한 축이다. 동식물에 이어 무생물까지 반려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도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가 존재한다. 상삼리 4인방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이렇게도 잘 산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갈수록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사는 1인 가구가 늘고 있다. 혼인을 했다고 해도 사별, 이혼 등 갖은 이유로 다시 홀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과 고립은 다르다. 정서적·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일상에서 필요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연대는 필요하다. 각자도생하는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를 고민하는 이유다. 따뜻한 밥 지어먹기 힘들고, 잔병치레가 많아지는 노년으로 갈수록 이 같은 연결망이 더욱 절실해진다.
삶에 정답은 없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법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공동체들이 이미 존재한다. 가족처럼 함께 살면서 전반적인 생활을 공유하는 주거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따로 살지만 일상의 일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도 있다. 이 공동체들은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닐지라도 함께 생활하고 돌보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 반려를 둘러싼 고민을 사회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상삼리는 향후 남성 노인들을 위한 공동생활홈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곽상국 상삼리 이장(54)은 어르신들이 고정관념을 버리기를 바란다. 곽 이장은 “내 집 두고 왜 거기 가서 사냐고 하시는 어르신들이 많다. 하지만 대다수는 보일러도 잘 안 켜고, 자식들이 고기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놔도 꺼내드시질 않는다. 자식들이 전화하면 ‘밥 잘 먹고 방 따뜻하게 지낸다’고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서로 삶을 공유하면서 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좋은데 바랄 게 뭐 있어요? 하늘나라 갈 때까지 몸이나 안 아팠으면 좋겠네.” 왕언니 여씨의 소망은 간결했다. 정씨는 “우리 왕언니서부터 모두가 더욱 건강해져서 2023년도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막내 이씨는 “우리 집이 사람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복작거리고 사는 게 좋지 않나”라고 했다. 김씨도 짧은 한마디를 보탰다. “다 행복하자고 이렇게 사는 거잖아요.”
특별취재팀
구경민·김지환·노도현·성동훈·이준헌·장용석·전현진 기자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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