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불황이 부추긴 인력 이동…사람 따라 기술도 엑소더스
불황에는 인력 이동이 많다. 사업 축소, 구조조정, 감원 등의 영향이다. 비자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좀 더 안정적인 직장과 직업을 찾는 이직 시도도 적지 않다. 조선업은 10년 넘은 불황에 전문직 인력이 첨단 산업 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최근 다시 호황을 맞았음에도 일할 사람이 없어 속앓이 중이다.
사람이 이동하면 필연적으로 변화가 뒤따른다. 시장이 변하고, 산업도 달라진다.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 변화와 부정적 결과도 생긴다. 영업비밀 침해, 기술 유출 같은 갈등과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위기 때는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할 수 없어 동종 업계 노하우를 가져오기 위한 인력 빼앗기가 늘어난다”면서 “불황에 인력 이동이나 기술 유출 등이 심화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불황이 부추기는 사회 혼란의 한 단면이다.
◇경기와 기술유출사건 상관관계
본지가 과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과 기술 유출 사건 추이를 분석한 결과, 대체로 경제성장률이 낮으면 기술 유출 사건이 증가하는 경향이 보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015년과 2016년 2년 연속 2%대를 기록했다. 2014년 3.2%에 비해 하강곡선을 그린 2016년, 법원(1심)에 접수된 기술유출사건은 15건으로 2014년 1건과 2015년 2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3.2%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2017년에는 다시 13건으로 사건이 줄어드는 듯했으나 연달아 2%대를 기록한 2018년과 2019년에는 각각 30건과 29건으로 상승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가봉쇄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어난 2020년에도 법원에 접수된 기술 유출 사건(21건)은 크게 줄지 않았다.
국정원은 “재택근무 등 비대면 업무 확산을 틈타 기술탈취목적의 해킹 시도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기술 유출 사건에 더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최근 5년간 적발된 산업기술 해외 유출 건수는 92건이다. 이 중 중소기업이 50건으로 가장 많았다. 중소기업은 대기업(33건)의 1.5배에 달했다. 2017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국내 기업 간 특허소송 현황에 따르면 전체 670건 중 566건이 중소기업 간 분쟁이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한 건은 83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
윤관석 국회 산업통상자원벤처기업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중소기업간 기술침해 피해액은 약 319억4000만원에 달했다. 기업당 기술침해 평균 피해 건수는 2018년 1건에서 2019년 1.2건, 2020년 3.4건으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2021년에는 한 기업이 평균 1.3건 기술침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 나가면 기술도 같이 나가
올해는 역대급 고용 한파가 예정돼 있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취업자 수가 지난해보다 8만명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KDI가 예상한 2022년 취업자 수 증가 폭(79만명)의 10분의 1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증가 폭을 8만5000명으로 예상했는데, 역시 2022년 증가 폭 예상치(82만명)의 11%에 불과하다.
고용 한파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말부터 심상찮은 감원 소식이 들려온다. 롯데면세점은 창사 이후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2020년에 한 차례 희망퇴직을 했던 롯데하이마트는 가전 시장 침체에 따른 실적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최근 또 대상자를 모집했다. LG전자 베스트샵을 운영하는 하이프라자도 희망자를 대상으로 근속 연차에 따라 기본급 4∼35개월치 위로금을 지급하는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은행과 증권가에는 이미 희망퇴직 삭풍이 불고 있다. 하이투자증권, 다올투자증권, 우리은행, 수협은행 등이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NH농협은행은 만 40세 직원마저 희망퇴직 대상에 포함했다.
역대급 고용 한파가 예고된 가운데 기술을 둘러싼 분쟁도 늘어날 전망이다. 최근 5년간 추이를 살펴보면 실업률이 높을수록 기술유출 관련 분쟁 건수도 많았다. 2018년 실업률은 3.8%로 17년 만에 최고치였는데, 같은 해 법원 1심에 접수된 기술 유출 사건은 30건으로 바로 전 해 13건의 두 배가 넘었다. 사람이 나가면 기술도 같이 나가는 셈이다.
특히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혼란의 시기, 국내 첨단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례 확대도 우려된다. 특허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 11월까지 적발된 국가 핵심기술 해외 유출 시도는 36건인데 이 중 22건이 대기업에서 일어났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 우리나라 주력 산업은 글로벌 경기침체에 휘청인다. 수출 효자 품목이던 반도체마저 꺾이면서 지난해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LG디스플레이는 자매사 전출 등 인력 운영 효율화에 착수했다. 작년부터 이어진 효율화 과정에서 이직 등 직간접적인 이탈이 예상된다. 국정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해외로 유출된 기술 중 디스플레이 분야는 반도체에 이어 2위다.
실제로 해외 기술 유출 사례 중 상당수가 퇴직자나 이직자를 통해 이뤄진다. 지난해 1월 법원은 국내 최대 양극재 생산업체 A사 퇴직 연구원들에게 영업비밀보호법 위반을 이유로 1심서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해외 후발업체 이직을 목적으로 자사 기술자료를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2020년에도 중공업 분야 퇴직자가 새 회사를 세워 기술을 유출한 사건이 기소, 처벌받았다. 각각 △조선업계 D사에서 퇴직을 앞둔 한 직원이 협력업체와 자문업체를 세워 중국으로 기술을 빼돌린 사례와 △대기업 철강회사에서 퇴직한 직원이 불법 유출한 '자동차 강판 도금량 제어기술' 자료를 토대로 동일한 설비를 제작해 외국 경쟁사에 판매한 사건이다.
국정원은 “최근 산업 스파이들은 클라우드·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다양한 경로로 기술을 유출하고 '다크웹'으로 기술을 유통하는 등 점점 고도화한 수법을 쓰고 있다”면서 “전직 금지 약정을 피하기 위해 직업 채용이 아닌 자문·연구용역 형식으로 위장하거나 기술탈취를 목적으로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등 합법과 비합법 경계를 넘나들며 유출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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