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위대한 유산
'당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한 납골당에 함께 모셔진 딸과 아버지의 영정 앞에 올려진 글이다.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던 부녀는 어떤 연유로 인연을 끊고 지냈고, 아버지는 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2019년 9월, 40대 초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의 휴대폰에는 어린이재단에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이 남겨져 있었다. 유일한 상속인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뜻에 동의했고, 기부된 전 재산 4억4000만원은 지역 저소득가정 아동들의 학습, 보육, 의료비로 지원됐다. 아버지는 기부금 지원 결과를 듣고, 본인도 유산 9000만원 기부를 결정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렇게 해서라도 딸과의 인연을 잇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듬해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는 딸과 같은 납골당에 안치되며, 두 부녀는 어린이재단의 최초 부녀 유산기부후원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안타깝게도 나는 생전의 두 분 후원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유산으로 삶을 지속하고 있는 아이들의 현재를 만나볼 수 있다.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아이, 운동에 재능이 있어 국가대표를 꿈꾸는 아이, 건강하게 자립해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아이 등 다음 세대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그 두 분의 따뜻한 발자취를 느낀다.
이러한 사례처럼, 다음 세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유산을 기부하는 '그린레거시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 출범 이래 60명이 뜻을 함께했다. 유산기부는 기부자의 평생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음 세대인 아동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유산기부라고 하여 꼭 전 재산을 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령의 부자만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젊은 세대도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의 일부만 기부 약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해외에서는 소중한 이들과 이웃에게 유산을 나누는 유산기부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 기빙USA재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전미 기부금액 4848억5000만달러(약 641조원) 중 유산기부는 9.5%, 460억1000만달러(약 58조원)에 달한다. 영국도 2020년 총 기부금액 약 113억파운드(약 17조원) 중 유산기부는 28%인 30억파운드(약 5조원) 규모로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2011년 상속재산의 10% 이상 기부 시 상속세 10%를 감면해주는 '레거시10'이라는 세금특례제도가 입법화돼 유산기부 문화 정착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의 유산기부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유산기부 세제 혜택에 대해 아직 논의 중이며, 피상속인 재산 중 일부는 상속인이 꼭 받아야 한다는 '유류분'이 법적으로 명시돼 있다. 따라서 다음 세대를 위한 사후 유산기부가 계획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유산기부 결정 단계 시 반드시 법률 검토가 수반돼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사회 속 관습처럼 남아 있던 자녀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분위기가 이제는 혈연, 지연을 벗어나 다음 세대를 위한 열린 형태의 유산기부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해에도 아동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다음 세대를 위해 희망찬 미래를 물려주는 것은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일 것이다. 이제 막 움튼 새로운 기부 문화가 아동의 희망찬 내일이라는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한국의 위대한 유산기부는 이제 시작이다.
[황영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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