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어는 부른다, 의미를 시대를
전시회 ‘모던 데자인’ ‘한티마을 대치동’ 슬로건에도 시대상 담겨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어느 공사 현장에는 안전 펼침막이 걸려 있다. 공사 현장은 넓지 않은데 펼침막은 사이즈가 꽤 크다. 펼침막에는 또박또박한 글자로 ‘안전베테랑은 현장정리부터’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무엇보다 여러 아시아 언어로 번역돼 적힌 문구가 인상적이다. 큼지막하게 쓰인 한글 아래 총 여섯 개의 언어가 있다. 하늘색 세계지도 이미지 옆에 영어가 적혀 있다. 이어서 베트남, 중국, 타이, 캄보디아, 몽골 국기 이미지 옆에 각 나라 언어가 나타난다. 나는 한자로 적힌 글자를 빼고는 읽을 수 없지만 이 그림 같아 보이는 글자는 분명 ‘안전베테랑은 현장정리부터’라는 의미일 것이다. 글자 사이로 위기를 조장하는 빨강, 노랑과 다른 ‘녹색’ ‘남색’ 계열로 동그랗게 굴린 형태의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색 배경과 색의 배합은 ‘위협’을 전하려는 이미지가 아니라 상식에 호소하는 이미지다.
읽지 못하는 글자의 잘 읽히는 뜻
아시아 각국 언어로 번역된 안전 펼침막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한때 서울 명동을 호령하던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호객용’ 중국어 간판은 여럿 보았지만 안전에 필수인 표어가 번역된 것은 처음이었다. 2022년 12월 현재 공사 현장에 주로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한 외국인노동자 비율은 60%를 웃돈다. 한국어로만 된 펼침막이 붙어 있더라도 많은 이가 대충 ‘감’으로 ‘조심하라는 뉘앙스’를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사소통을 목표로 명료하게 번역된 아시아 각국의 언어는 이 안전 표지판의 존재감을 격상시킨다. 이 안전 펼침막은 있으나 마나 한 배경막이 아니라 정보값이 있는 ‘실체’로 존재한다. 공사 현장의 위험도를 낮추는 방식으로서 표지판의 언어는 ‘읽힐 것’을 택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말초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내놓아야 하지만 현장의 합의된 방식으로서 ‘정리’를 제안하기 위해서는 읽힐 아시아의 언어를 제시한 것이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매해 6월24일은 ‘건설의 날’이다. ‘안전베테랑은 현장정리부터’는 2021년 건설의 날에 선포된 슬로건이다. 이미지를 보면 ‘정리’라는 문구 위에 체크박스에 들어갈 체크 표시가 딱딱 있다. 그래서 스타카토 같은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국토안전관리원은 이 슬로건을 설명하는 세부 지침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첫째, 발주자는 ‘매일 아침 작업 전 10분 현장정리’. 둘째, 시공자는 ‘위험공간 분리, 이동통로 확보’. 셋째, 근로자는 ‘작업 전후 불필요한 자재, 도구 즉시 치우기’. 고속도로에서 볼 수 있는, 잠을 확 깨우다 못해 공포영화 자막 같은 ‘생명줄’ 등의 언급과 달리 감각이 아닌 작은 실천을 지시했다.
개인적으로 거리의 표지가 가장 재밌었던 시절은, 꼬마였던 동생이 한글을 배우기 이전까지였다.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거나 같이 걸으면서 아직 한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말은 잘하는 다섯 살 동생에게 간판을 거꾸로 읽어주거나 터무니없는 글자로 읽어주곤 했다. 얼마 뒤 동생이 간판을 읽게 됐을 때부터 나는 간판이 도무지 재미없어졌다. 대한민국의 간판에 쓰인 글자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은 내 편견일 수 있겠지만, 가슴을 너무도 활짝 편 것 같은 평균 이상 크기의 인조인간처럼 달라붙은 글자들은 과잉 그 자체였다. 시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표어와 함께 살아온 국가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건설의 날’ 슬로건은 물론, 각 초등학교 아니 각 학급의 급훈! 서울시는 오늘도 ‘서울’을 부르는 새로운 슬로건을 공모하고 있다.
필운동 거리에서 본 아시아 6개국 언어로 적힌 안전표지 펼침막이 동시대 외국인노동자의 양적 증가를 의미하듯 거리의 표지판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다. 또 표지판과 글자를 그리고(도안하고) 디자인하는 ‘레터링’은 시대의 크고 작은 변화를 흡수하는 지표다. 이제는 익숙해진 레트로(Retro) 열풍으로, 아기자기한 손맛의 글씨체가 인쇄된 사물, 간판, 이모티콘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서울 마포구의 카페 ‘영 앤 도터스’는 브랜드 서체, 음료수 컵에 새겨진 글자 모두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닌 ‘보는(보여주는) 글씨’다. 이 글자의 모양은 마치 할 말을 하기보다는 입을 꾹 다물고 다정함, 귀여움, 앙증맞음 등등을 눈웃음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롯데껌의 박진감, 대치동의 미래
레터링은 시대를 반영한다. 동시대 레트로의 정서가 다시금 돌고 돌아 나타나는 일상의 한편에는 디자인과 도시문화를 연구하는 전시의 맥락에서 과거의 레터링이 탐구 대상으로 등장한다. 표지판과 글자체는 ‘특정 시공간의 집약된 상’으로 주요한 관람 대상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2023년 3월26일까지)는 해방 이후 미술과 산업의 관계를 다루는 방대한 자료와 작품 등을 다룬다. ‘모던 데자인’이라는 제목은 전시를 기획한 학예연구사 이현주씨의 설명에 따르면 “1958년 개최했던 ‘제2회 한홍택 모던 데자인전’에서 발췌한 것으로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일반화하기 이전 도안, 산업미술, 생활미술, 응용미술, 장식미술과 같이 번역된 어휘가 뒤섞여 사용됐던 1950~1960년대 시대적 조건을 환기”(전시도록, 17쪽)한다.
특히 전시장 공간에서 1950~1960년대 한글 레터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장우석은 <한글 레터링 컬렉션>(2022)이라는 그래픽 설치 작업에서 진통제 ‘소보린정’(1956), 종합영양제 ‘원기소’(1958), 위장약 ‘이마루’(1960) 등의 레터링 수십 개의 형태와 구조적 짜임새 등에 주목했다. 1969년 롯데껌이 내놓은 ‘새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글자는 “멕시코산 천연 치클, 알루미늄 특수 은박지 포장 등 원료와 기술 측면에서 기세를 올리던 롯데껌의 슬로건”(전시도록, 227쪽)으로 느낌표가 두 개 찍힌, 박진감이 호쾌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티마을 대치동’전의 한편에도 서울 대치동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표지판, 일종의 표어를 보여준다. ‘한티마을 대치동’ 전시는 학원가로서 대치동의 면모에 집중해 하나의 동네에 서린 역사를 다룬다. ‘모던 데자인’ 전시가 1950~1960년대 표어를 디자인과 레터링의 감각 속으로 들어가 ‘형태’에 주목해 다룬다면, ‘한티마을 대치동’ 전시는 급격한 변화로 ‘교육 특구’가 된 한 지역의 표면을 보여주는 데 간판을 활용한다. 전시장 한 벽면에는 ‘국어의 만점을 완성한다’ ‘입시화학 비밀을 풀다’ ‘이것이 진짜 국어다’ 등 1990년대, 2000년대 학원 간판 문구가 채워져 있다. 이 서체는 글의 서두에 썼던 공사장 안전 펼침판이 강조했던 ‘현장’(현재)이 아닌 미래로 가득하다.
할머니의 붓글씨
‘한티마을 대치동’ 전시장에는 휘문고를 다닌 한 학생의 방이 재현돼 있다. 그 방엔, 학원 간판으로 채워진 어느 거리를 걷다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온 한 개인이 바라볼 또 다른 표어가 있다. <수학의 정석>이 가지런히 놓인 책장 위에 붓글씨가 하나 있는 것이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할머니’라고 쓰여 있다.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남성 정치인, 자칭 지도자들이 날려쓴 표어가 난무한(했던) 한국 사회에서 할머니의 표어는 신선하지 않은가.
글·사진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시청각 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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