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교+김은숙’ 웃음기 지운 복수극 살벌했나요 [더 글로리 어땠어?]
“왕자님” 대신 “망나니”…피해자·약자 연대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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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이하 ‘학폭’) 피해자인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이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한테 복수하는 내용이다. 문동은은 온 생을 걸고 치밀하게 준비해 가해자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려고 한다. 복수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이런 설정은 학폭 드라마의 익숙한 코드다. 그런데도 <더 글로리>는 제작단계부터 관심을 받아왔다. ‘멜로 대가’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의 첫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김은숙 작가는 <파리의 연인> <태양의 후예> 등 로맨틱 코미디에서 달곰한 대사와 볼 붉어지는 설정들로 시청자들을 설레게 해왔다. 송혜교는 <가을동화> <올인> 등에서 절절한 사랑을 하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 2023년 얼굴에 웃음기를 뺐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달달했던 이들이 웃음기를 지우니 더 살벌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총 16부작으로 지난달 30일에 1~8부(파트1)를 내보냈다. 9~16부(파트2)는 오는 3월에 공개한다. 파트1은 문동은이 학폭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삶을 보여주고, 그가 가해자들한테 복수 계획을 알리고 세팅하고 실행하기 직전까지를 담았다.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의 복수는 계획대로 이뤄졌을까. 2023년 첫번째 드라마‘토크’는 <더 글로리>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김은숙 작가와 문동은 역할을 맡은 송혜교가 제작발표회에서 했던 얘기를 함께 담았다.
남지은 기자 = 김은숙 작가는 왜 갑자기 학폭드라마를? <더 글로리> 제작 소식에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던 점이다.
김은숙 작가(제작발표회에서) = 나도 곧 고2 되는 딸의 학부형이다 보니, 학교폭력(이하 ‘학폭’)이라는 소재는 나한테 가까운 화두였어요. 어느 날 딸이 물었어요. ‘엄마는 내가 죽도록 누구를 때리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죽도록 맞으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그 질문이 충격이고 지옥이었습니다. 짧은 순간 많은 이야기가 떠올라 컴퓨터를 켰어요. (<더 글로리>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남지은 기자 = 학폭드라마는 최근 1~2년 사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오티티)를 중심으로 많이 등장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화두다. 그러나 김은숙 작가가 학폭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더 글로리>를 보는 동안 마음이 더 무겁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김은숙이니까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학폭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됐다.
정덕현 평론가 = 복수 방식은 학폭을 다루던 많은 콘텐츠와 비교하면 사이다 맛은 아니다. <돼지의 왕>(티빙)은 벼랑 끝까지 밀고 나가고, <약한 영웅>(웨이브), <3인칭 복수>(디즈니플러스)는 주먹은 주먹으로 다스리는 액션이 더해진다. <더 글로리> 파트1에서는 문동은이 가해자들한테 ‘저주의 말’을 내뱉는 정도다. 이런 장르를 많이 본 이들은 말로만 하는 복수가 답답할 수 있다.
남지은 기자 = 사실 문동은의 복수에는 답답한 점이 꽤 있다. 저게 가능해?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하는 걸 다 얻어내기에는 너무 평범한 인물 아닌가. 시간도 없었는데 언제 치밀한 전략을 짰나. 10대 때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 공부했고, 이후에는 수능을 쳤고, 20대는 복수 자금 마련하려고 과외하느라 바빴다고 직접 말했다. 임용 고시 두번 도전해 선생이 됐다. 그 ‘잘난’ 집안의 가해자들이 문동은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해 끌려다니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더 글로리>를 보게 만드는 힘은 분명 있다. 김은숙 작가는 학폭에 피해자의 연대를 더했다. 그 바탕에 빈부격차의 문제를 깔았다.
정덕현 평론가 =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을 다루지만, 밑바닥에 깔린 건 수저계급으로 나뉘는 양극화 문제다. 부자 부모를 둔 이들은 가해자가 되어도 처벌받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피해자가 되어도 보호받지 못하는 신계급사회의 차별을 지목하는 것. 그래서 길바닥에 나앉은 문동은이 바둑 같은 복수 방식을 취하는 건 흥미롭다. 결국 바둑은 자기 집을 지키면서 상대의 집을 빼앗는 것. 하나하나 포석해야 하고 상대가 돌을 던질 수밖에 없는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야 한다. 양극화 사회에서 ‘집’의 문제를 바둑이라는 은유를 가져오고 그 방식의 복수를 내세우고 있는 건, 김은숙 작가 특유의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서사가 투영된 느낌이다.
남지은 기자 = 여러 곳에서 ‘빈부’를 설정해놓고, 그 격차를 강조하는 상황을 자주 만든다. <더 글로리>에서 가해자들이 학폭을 저지르는 이유는 단 하나. “다섯 글자로 사회적 약자.” 국회의원 아들인데도 유약한 성격이어서 폭력에 내몰리는 등(<약한 영웅>) 다른 이유가 <더 글로리>에는 없다. 가해자들 중에서도 재력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 갈등이 일어나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박연진과 이사라(김히어라)는 최혜정(차주영)이 가난하다는 걸 알고 친구면서도 모욕을 준다. 박연진이 그의 딸한테 비싼 것과 싼 것의 구분을 강조하는 대사도 자주 들려준다.
정덕현 평론가 = 학교폭력에 더해진 사회적 양극화와 계급화의 문제를 건드리는 부분은, 글로벌 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기생충> <킹덤> 등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케이(K)콘텐츠들은 한국 사회의 엇나간 시스템 문제를 건드린 것들이었다. 세계인들에게도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 역시 이러한 사회 비판적 요소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남지은 기자 = 무엇보다 의미있는 대목은 학폭을 피해자 연대로 확장한 점이다. 가정 폭력 피해자 강현남(염혜란)과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일 것 같은 주여정(이도현)이 학폭 피해자 문동은을 돕는다. 강현남과 문동은의 때론 가족같기도 한 연대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주여정이 ‘같은 편 먹는’ 과정은 좀 어색하지만 그가 “왕자님”이 아니라 “함께 칼춤추는 망나니”가 되어준 건 다행이다. 주여정의 사연을 조금 더 빨리 드러내 긴장감을 조성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건 있다. 그도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쓰임새를 모르겠더라. 잘 활용했다면 드라마를 더 잘 살렸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파트2에서 기대되는 캐릭터다.
정덕현 평론가 = 주여정과 문동은의 관계는 연대하는 멜로랄까. 약자, 피해자들의 연대가 강자, 가해자들의 연대와 대결하는 작품이어서, 문동은 옆의 주여정과 강현남 같은 인물은 파트2에서 훨씬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김은숙 작가(제작발표회에서) = 동은과 여정의 관계는 연대 혹은 연애 사이 어딘가에요. 둘의 감정을 잡는 게 어려웠죠.
남지은 기자 = 김은숙 작가가 쓴 학폭드라마여서 다른 점은 강현남 캐릭터에서도 나타난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수많은 드라마에 나오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면모가 보인다. 문동은을 통해 자신을 찾게 된 강현남이 웃는 장면에서 이런 대사를 친다.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명랑하지만 명랑할 기회가 없다가 숨이 쉬어져서 가끔 웃게 돼요.” 김은숙 작가의 시선으로 강현남을 바라봤기에 나올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정덕현 평론가 = 김은숙 작가 특유의 말맛 가득한 대사를 웃음기 빼고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송혜교의 연기도 주목할만하다. 그 변신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서사의 재미와 사회를 꼬집는 은유적 장치들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남지은 기자 = 송혜교 연기는 여러 의견이 나오지만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 호흡과 목소리 톤을 조절하는 게 느껴지더라. “연진아 신발은 벗어야지” 할 때 “신~발”하고 내뱉는 호흡이라든지. “브라보 박연진”을 외칠 때의 발성이라든지, 노력이 느껴졌다.
송혜교(제작발표회에서) = 어린 ‘동은'은 무방비 상태로 아픔과 상처를 받았지만 성인 ‘동은'은 가해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인물이기에 불쌍한 모습보다는 단단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데 집중했어요. 복수하는 장면들을 모니터링하면서 ‘내가 이런 표정도 있구나' 생각이 들 때 희열을 느꼈어요. 외적으로는 답답하게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셔츠를 입으면 목 끝까지 단추를 다 채우는 설정을 만들어갔습니다.
남지은 기자 = 작품이 흥행하면 학폭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정작 청소년들은 못 본다. 사적 복수를 택하고 욕설이 등장하고 학폭 내용이 담겨 있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우선 학폭 드라마에서 늘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선생님들이라도 반드시 보게 하자.
김은숙 작가(제작발표회에서) = 피해자 글을 많이 읽게 됐어요. 현실적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세속에 찌든 나로서는 ‘진심 어린 사과로 얻어지는 게 뭘까’를 고민했어요. 얻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하는 거구나. 폭력의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존엄이나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되는데 그 사과를 받아내야 비로소 원점이고 거기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제목을 <더 글로리>로 적었어요. 이 드라마는 문동은, 정현남, 주여정 같은 피해자분들께 드리는 응원입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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