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동거가 부른 뜻밖의 위로···한 편의 치유극, 혹은 판타지 ‘오펀스’[리뷰]
치유와 회복의 이야기
남명렬·박지일·추상미·양소민 출연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회전문 관객 줄이어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고아 형제가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을 납치한다.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이 남자로 한몫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남자를 납치한 형 트릿이 집을 비운 사이, 남자가 단단하게 결박했던 밧줄을 풀고 마치 제 집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남자는 도망치기는커녕, “너희는 아마추어”라고 훈수를 두며 집에 아예 눌러앉으려 한다. 알고 보니 납치된 남자 해롤드는 시카고의 갱스터다. 납치범과 납치 피해자의 권력관계가 묘하게 역전되며 셋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연극 <오펀스>(김태형 연출)는 세상에서 섬처럼 고립된 고아 형제와 중년 갱스터의 이야기다. 미국의 극작가 라일 케슬러의 대표작으로 1983년 초연해 세계 각지에서 40년 가까이 꾸준히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알 파치노, 알렉 볼드윈 등 유명 배우들이 해롤드 역으로 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국내에는 2017년 처음 소개돼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연극은 셋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해 이들이 점차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해롤드는 도둑질로 연명해온 형 트릿에게 자신을 위해 일하면 큰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해롤드는 폭력적인 성향의 트릿을 가르치고 때로 길들이며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두려움 때문에 집 안에서만 지내는 동생 필립에겐 지도를 읽는 법을 알려주며 바깥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북돋아준다.
극 속 해롤드는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다. 등장 때부터 매력이 넘치며, 한눈에 형제의 결핍을 알아차릴 정도의 예리함에 지성과 유머 감각, 여유까지 갖췄다. 재력도 있어 고아 청년들에게 대가 없는 호의도 베푼다. 그 역시 고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앵벌이 키즈’로 살았던 해롤드는 다른 고아들에게 ‘치유자’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준다. 상처 입은 세 인물이 서로에게 대안 가족이 되어주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다룬 연극이지만, 다소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 배우들만 출연했던 초연과 달리 재연부터는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여성 배우들도 출연한다. 미국에서 초연한 이후 세계 각지에서 공연했지만 여성 배우들이 공연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해롤드 역할은 남명렬·박지일·추상미·양소민 네 배우가 번갈아 맡았다. 남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공연을 보고 싶다면 남명렬·박지일 캐스팅으로, 세 배역 모두 여성이 연기하는 공연을 보고 싶다면 추상미·양소민 캐스팅으로 관람하면 된다.
동일한 연극에 출연 배우들의 성별이 달라졌을 뿐인데도 완전히 색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공연 말미 해롤드가 트릿을 향해 “딸아”라고 부르는 장면은 여성 페어 공연에서만 바뀐 부분이다.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2월26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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