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칼협' 세태 비웃으며 복수의 끝을 달리는 '더글로리'

정민경 기자 2023. 1. 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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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구조적 불평등과 피해자 공감 찾기 어려운 '누칼협' 시대
이유 없는 학폭과 피해자 상황, '누칼협'으로 종결할 수 없는 문제
'피해자인 이유' 찾으려는 이들의 논리 하나하나 깨는 전개

[미디어오늘 정민경 기자]

※이 글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누칼협'은 지난해부터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유행어다. 누칼협이란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로, 온라인에서 내 상황이 힘들다고 하거나 불만을 말하면 '누칼협?'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 회사에 불만을 말하면 '그 회사 다니라고 누칼협?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되지'라든가, 연애나 관계에 불만을 말해도 '그 사람이랑 사귀라고 누칼협?' 식의 반응을 마주한다. 결국 '모든 것은 네가 선택한 것이니 불만 갖지 말고 감내하거나 스스로 해결하라'는 태도다. 힘든 상황에 부닥친 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보다는 “네가 선택했으니 네가 알아서 해야지”라는 태도는 사회 구조로 인한 불평등을 쉽게 지운다. 사람들은 구조로 인한 불평등이나 피해로 인한 힘듦을 호소하는 것보다 그 힘듦을 노력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를 환영한다.

누칼협이 유행하는 시대, 학교 폭력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학교 폭력 문제는 어쩌면 누칼협 논리에서 조금은 예외인 소재일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누칼협'을 많이 접하는 1020 여론을 살펴보면, 학교 폭력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이뤄지는 이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아이돌이나 배우가 데뷔했을 때 가장 먼저 점검 받는 사안이 과거 학교 폭력 이슈일 정도고, 학교 폭력 가해 기록이 나타나면 여론은 대부분 돌아선다. 물론 가끔 '왕따 당하는 애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전학을 가면 되지'라는 의견도 눈에 띄지만 공감 받지 못할 때가 다수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포스터.

학교 폭력을 소재로 그린 넷플릭스 '더 글로리'(연출 안길호·극본 김은숙)는 수많은 논의가 누칼협으로 끝나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누칼협으로 끝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상기시킨다. 더 글로리는 건축가를 꿈꿨지만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자퇴한 주인공 문동은(배우 송혜교)이 가해 주동자인 박연진(배우 임지연) 등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동은은 연진의 아이의 담임교사로 부임한 후 가해자들을 벗어날 수 없는 복수의 판으로 끌어들인다.

동은이 당하는 학교 폭력에 그의 잘못은 없다. 동은은 주동자 아이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진 않지만 사실상의 인질로 잡고 복수의 판을 짠다. '아무리 가해자라도, 가해자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동은은 말한다. “그 시절 나 역시 잘못이 없었다.” 이 대사는 동은이 또다른 가해자인 담임 선생님의 아들이자 자신의 대학 선배의 집에 찾아가 하는 말이다. “물론 알죠. 선배님에게는 죄가 없는 것. 그런데 그때 저도 죄가 없었거든요. 선배님은 어른이지만 저는 열여덞이었거든요.” 라는 대사다.

'피해자인 이유' 찾으려는 이들의 논리 깨는 전개

동은 이전에도 박연진과 가해자들은 윤소희라는 아이를 같은 방식으로 괴롭혔다. 소희는 학교 근처 폐건물 옥상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는데 극 중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임이 언급된다. (윤소희 이야기는 파트2에서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누구인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학교 폭력에 '피해자인 이유'는 없다. 김은숙 작가 역시 “연진의 악행과 악의에는 어떤 이유도, 미화도 없다”고 말한 적 있다. 말 그대로 '누가 칼로 협박하는 상황'과 다름없다. 극 중에선 고데기를 든 가해자들에게 협박을 당하는 셈이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속 장면. 사진출처=넷플릭스.

게다가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에게서 '피해자의 이유'를 찾으려는 이들이 가질 궁금증을 하나하나 깨어나간다. 예를 들어 '저걸 당하고만 있나. 선생님에게 말하면 되지 않아?'라는 생각은 담임 선생의 등장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담임은 자퇴서에 학교 폭력을 고발하는 동은에게 사정을 묻기보다 뺨을 때린다. 자퇴 사유를 학교 폭력이라고 밝히면 자신이 곤란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의 폭력도 방치한 선생이다. 담임 선생 역시 또 다른 가해자로 복수의 대상이 된다.

동은이 다른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잔인한 학교 폭력으로 화상을 입고 찾아간 보건실에서 보건 선생은 동은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연진의 방해로 오히려 보건 선생은 퇴사하게 된다.

연진의 부모는 지역 경찰에도 영향을 미친다. 형사적 방법으로도 해결이 어려운 이유다. 반면 동은은 부모 중 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며, 어머니는 동네 이발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동은의 가족은 가난해 달방에 산다.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와도, 그 달방에서도 학교 폭력은 계속된다. 그때 동은을 도와줄 부모는 없다. 어머니는 가해자 연진의 어머니가 내민 합의금에 사인을 한다. 심지어 딸을 버리고 이사를 가버린다. 달방 주인은 딱한 사정을 알고도 “엄만데, 찾으러 오겠지”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방을 정리한다. 동은이 가해자 사진을 부착한 벽엔 엄마 사진도 달려 있다. “가족은 첫 번째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 이유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문동은이 자신이 머무는 빌라 한 벽에 가해자들의 사진을 붙여놓은 모습이다. 사진출처=넷플릭스.

'누칼협'으로 종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동은에겐 그를 도와줄 부모도, 선생도, 경찰도, 지역 사회도, 법도 없었다. 결국 동은은 사적 복수의 길을 갈고 닦는다. 복수의 길에는 각양각색으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 공모한다. 이들의 복수극 속에서 피해자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혹은 '복수해봤자 아무것도 득 될 것 없다'는 말은 무용하다. 동은과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다. “사과하지 마. 사과 받자고 10대도, 20대도, 30대도 다 걸었을까. 넌 벌 받아야지”라는 대사는 사과는 시작일뿐 가해자에 대한 징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 특성 때문에 어둡고 잔인하며,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잔인한 묘사로 끝까지 보지 못하겠다는 시청자 호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선샤인'을 집필한 김은숙 작가 특유의 흡인력으로 멈출 수 없이 정주행하게 만든다는 평 역시 다수다.

다만 주여정(이도현 배우)과의 로맨스나 강현남(염혜란 배우)과의 공모를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점과 학교 폭력의 잔인한 장면과 욕설 등을 여과 없이 표현해 자극적이라는 지적은 나올 수 있다.

김은숙 작가는 제작발표회에서 “동은이, 현남이, 여정과 같은 피해자들에게 주는 응원 같은 작품”이라고 더 글로리를 소개했다. '누칼협'이라는 말로 수많은 논의를 종결하는 시대, 더 글로리는 누군가는 별다른 잘못 없이 몹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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