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원동력은 ‘未完成’… 더 노력해야지 후퇴할 순 없잖아요”[파워인터뷰]

박세희 기자 2023. 1. 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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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을 앞둔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는 연극 연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는 “아직 완성이 되지 못했기에 꾸준히 계속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김호웅 기자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 이순재는 “자꾸 우리의 후진적 사고방식으로 젊은이들의 미래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호웅 기자

■ 파워인터뷰 - 구순 앞둔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

지금이 인생 4막… 중요한 포인트

1956년에 데뷔 67년째 달려왔죠

나 스스로 완성되지 못했다 생각

꾸준하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

예술도 한이 없어요, 그냥 해야지

2023년에는 무언가 변화가 올 것

이 나이에 가장 큰 어려움은 암기

막히면 자꾸 반복해 몸에 익히죠

인터뷰 = 박세희 문화부 기자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 저녁 7시로 예정된 연극 ‘갈매기’ 리허설이 시작되기 10분 전, 무대 뒤편 대기실에선 작은 소동이 일었다. 앞선 인터뷰 일정으로 저녁을 먹지 못한 연출 겸 배우 이순재에게 스태프들이 연거푸 식사를 권했으나 그가 손사래 치며 바로 리허설에 들어가자고 이야기하면서다. 결국 이순재는 스태프에게 끌려 식당으로 향했으나 실랑이는 한참을 이어졌고, 구순을 앞둔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재는 올해 여든아홉이 됐다. 현역 최고령 배우다. 구순을 앞두고 있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작품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젊고 강하다. 여든아홉이면 기존에 해오던 연기 활동조차 조금은 힘에 부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연극 연출이다. 이순재의 연극 연출작 ‘갈매기’ 개막을 계기로 그와 만났다.

새로운 도전은 연기의 대가인 그도 떨리게 하는 듯했다. “그동안 배우들과 함께 열심히 연습했으니 노고의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합니다. 극장도 크고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에게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잘 전달되느냐입니다. 배우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 작품에 담긴 메시지나 사상, 철학을 정확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해 이 작품의 의미와 목적이 전달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입니다.”

이순재는 자신의 첫 연출 도전작으로 연극 ‘갈매기’를 택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인 ‘갈매기’는 작가 지망생 뜨레블례프와 배우 지망생 니나, 유명 작가 뜨리고린과 뜨레블례프의 어머니인 유명 배우 아르까지나를 둘러싼 이야기로, 꿈 많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의해 참패를 맞으며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선명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왜 ‘갈매기’를 택했을까. “제가 그동안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체호프의 4대 희곡을 모두 분석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물론 좋지만 ‘갈매기가 정말 좋은 작품이다, 제대로 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문 배우들과 큰 무대에서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었죠. 사실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규모도 크다 보니 재정적으로도 염려가 되는 작품이었는데 용기를 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다는 이순재는 체호프에 관해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체호프는 정치, 경제, 문화, 의학, 천문, 지리 모두를 꿰뚫는 작가입니다. 그런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 산물이 그의 작품들이죠. 체호프의 작품은 배우나 연출가나 모두 하고 싶어 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명작이고 고전이죠. 고전이라는 건 시대와 종교, 종족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는 체호프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다루잖아요. 몇 백 년 전 것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 예술은 영원합니다.”

사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갈매기’는 익숙할 것이다. 워낙 유명한 고전인 데다, 그동안 한국 연극계에서도 시대적 배경과 장소 등을 변경해 수차례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어떤 연출은 비극적인 사랑에 초점을 맞췄고 어떤 연출은 인물 간 갈등과 인간관계에 중점을 뒀다. 이순재는 원작 그대로의 메시지를 택했다. 젊은이들의 꿈이 기성세대에 의해 좌절당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연출도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정석대로 했다. “원작을 훼손하고 이상한 설정들을 해놓은 작품들을 보면, 이건 작품의 의미도 모르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저의 ‘갈매기’는 체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고 의도입니다. ‘이런 작업이 한번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연극의 진수를 최선을 다해 발휘해 관객들에게 본질을 전달하려 합니다.”

특별하고 화려한 무대 연출이 없는 연극 ‘갈매기’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크게 중요한 작품이다. 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이지만 그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통찰하는 극인 만큼, 배우 간 오가는 대사와 연기가 관건이다. 이에 이순재는 연출보다는 배우들에게 집중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연극은 본래 배우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갈매기’는 특히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합니다. 연출가가 전면에 나서서 여러 장치나 연출가적 행위를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뒤에서 지켜보며 배우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실제로 ‘갈매기’의 배우들은 대한민국 연극계 ‘어벤저스’급이다. 이순재 본인을 포함해 연극계에서 내로라하는 주호성, 김수로, 이항나, 강성진 등의 배우들이 다 함께 출연한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로 이순재와 함께 출연했던 배우 진지희도 ‘니나’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감회가 새롭죠. 진지희 배우뿐 아니라 젊은 배우들을 보면 창의력도 좋고 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물론 젊은 배우들이 고전을 연기하기는 쉽지 않아요. 언어도, 표현도 달라졌기 때문에 일부 배우들은 언어 훈련을 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전달이 중요하기에 저희 땐 사전을 펴놓고 대본 연습을 했는데 이번에도 언어 부분에 역점을 두고 연습했습니다. 모든 관객들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요. 체호프 작품의 경우 정확한 대사 구사로 작품의 내용을 전달해야 해서 특히 언어 구사가 중요합니다. 의미가 배우의 연기력으로 구체화되는 거예요. 보통 배우들이면 안 됩니다. 우리 배우들이기에 잘 해내고 있습니다. 허허.”

“‘갈매기’ 연출은 버킷리스트… 기성세대에 짓눌린 청춘의 고통 보여줄 것”

제정러시아 시대 체호프 작품

여전히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현재 젊은이들의 모습과 같아

전보다 청년들 체격·두뇌 우수

마음 먹는다면 노벨상도 가능

진정한 어른 ‘꼰대 노릇’ 없이

창의력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

극 중에서 뜨레블례프는 기성세대의 연극과 다른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선보이지만 본인의 어머니인 아르까지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받는다. “극의 마지막 대사가 ‘난 갈매기다. 당신이 총으로 쏴 죽인 갈매기. 심심풀이로 쓰다 버린 갈매기’입니다. 뜨레블례프와 니나, 원대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며 성장하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의해 좌절되죠. 이 작품은 제정러시아 말기에 쓰였는데 그 체제하에서는 젊은이의 미래도 없다, 그러니까 바꿔야 한다는 게 체호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갈매기’는 제정러시아 말기에 쓰인 작품이다. 무려 127년 전인 1896년 초연됐다. 이 작품이 2023년 한국에서 갖는 의미는 뭘까. “제정러시아 말기에 서민들의 삶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민중들은 정말 고난에 허덕였습니다. 이런 명제는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고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고전이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죠. 오래전에 쓰인 체호프의 작품이 현재 우리 세대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젊은이들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젊은이들, 종족(種族) 자체가 개량됐다고 봅니다. 용모와 체격, 머리 다 달라졌어요. 학교에서 수업할 때도 보면 예전엔 한 달씩 걸리던 게 지금은 보름이면 돼요. 잠재돼 있던 민족적인 기능이 깨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이걸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젊은이들이 정말 마음먹고 목적하는 바를 향해 최선을 다하면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은 앞길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을 위해선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건 친한 정치인들에게도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젊은 세대들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우리가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고 활기 있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조건들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면 각 분야에서 글로벌 스타, 노벨상 수상자 나옵니다. 충분히 나와요.”

젊은 세대의 앞길을 위해선 기성세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가 연출 도전작으로 ‘갈매기’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였다. “당시 체제하에선 젊은이의 미래도 없다고 설파한 작품이에요. 체호프의 작품들이 다 그래요. ‘벚꽃동산’도 체제의 붕괴를 상징하죠. 다만 시대적인 여건상 위장을 했을 뿐이지요. 우리도 그걸 유념해야 합니다. 자꾸 우리의 후진적 사고방식을 갖고 끼어들어 젊은이들의 미래를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순재는 ‘진정한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꽃보다 할배’(tvN) 등 예능 프로그램들을 통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 등 그의 어록들이 알려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존경받는 그다. 그에게 어떻게 하면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쉬워요. 꼰대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습성과 사상,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전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목표, 새로운 능력을 갖고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구닥다리 꼰대들이 끼어서 훼방을 놓냐는 말이에요. ‘그러지 말자’ ‘다만 뒤에서 그들이 창의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자’ 그게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그에게 ‘지금 이순재는 인생의 몇 번째 막에 와 있는 거냐’고 물었다. “‘갈매기’가 총 4막으로 구성돼 있으니 지금 전 4막이죠. 4막에 와 있는 지금,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하고 동료 배우들과 함께 막을 올렸다는 게 참 뜻깊습니다. 제 연기 인생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1956년 데뷔한 뒤 67년째 쉴 틈 없이 연기해온 그다. 그동안 출연한 영화도 100편 이상, 연극도 100편 이상이다. 완벽한 자기 관리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대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완성’(完成)에 대해 이야기했다. “완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성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꾸준히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도 수십 개의 상을 타고 돈도 수십억을 벌어 빌딩 몇 개 가지고 있으면 안주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지도 않고 그런 것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고요. 새로운 작품을 한 편 한 편 할 때마다 난제가 생깁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완하고 노력하죠. 이게 우리 작업의 연속입니다. 물론 천재적인 예술가가 나타나 한 작품으로 완성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배우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요. 명배우는 더러 있었으나 그게 연기의 완성은 아니다 이겁니다. 사실 완성은 없어요. 도달하지 못합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완성은 아니지요. 그 이후 새로운 음악가들이 나와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잖아요. 마찬가집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 꾸준히 해나갈 뿐입니다.”

정정한 모습이지만 아흔을 앞두고 있는 그이기에 빼곡한 스케줄이 몸에 무리가 되진 않는지 물었다. “연기는 제게 의무이고 과제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죠. 엄살 부리려면 드러누워야죠. 허허. 멀쩡해 보이지만 자려고 누울 땐 ‘아이고아이고’ 곡소리 해요. 그런데요, 우리 예술은 한이 없어요. 완성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냥 하는 거예요. 우리가 가끔 착각하는 게, 수입도 많아지고 인기도 높아지면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건들이 계속 남아요. 그걸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남는 거지, 한때의 인기로 연명했던 친구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고령의 배우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암기’라고 했다. “우리 나이 되면 암기력이 문제예요. 떨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하고 자기 점검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 통계 자료들을 암기했다 일주일 후에 되새김해 보는 훈련을 합니다. 대본을 외우다 보면 더러 막히는 데가 있어요. 어쩔 수 없죠, 나이가 있으니. 다시 떠올리고 기억해두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번 막히는 데서 자꾸 막혀요. 그러면 더 반복해 아주 몸에 익혀버립니다. 그래야 실수를 안 하니까요.”

그에게 계묘년 새해 계획을 물었다. 새해에도 그의 계획은 쉴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올해에도 많은 과제들이 있어요. 지금 드라마를 촬영 중인데 계속 찍어야 하고 영화도 한 편 계획돼 있습니다. 6월에는 연극 ‘리어왕’도 무대에 올라요. 영화 섭외도 몇 편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느긋하게 산 적이 없어요. 늘 닥친 일이 있었고 해냈습니다.”

새해를 맞아 그에게 덕담을 요청했다. “지난 한 해 여러 가지로 변화들이 있었던 해고, 아직 코로나19 후유증도 있어 쉽지 않았습니다. 2023년도에는 뭔가 많은 변화가 오지 않겠나 싶습니다. 우리 국민들 모두 즐겁고 유쾌하게 생활하는, 기분 좋은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보고 가야지, 후퇴할 순 없잖아요. 허허.”

■배우 이순재는

“배낭여행? 쌀자루 등짐 진 6·25 피란길 생각”… 서울대 연극반 재건해 본격 활동

‘배낭여행’이라는 단어에서 6·25전쟁을 떠올릴 이가 몇이나 될까. 구순을 앞둔 배우 이순재(89)에게 배낭여행은 6·25전쟁 당시 등에 짊어지고 피란했던 쌀자루를 떠오르게 한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배낭여행에 관한 질문을 받자 6·25를 언급해 제작진을 아연케 한 그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배우 이순재는 우리 근현대사의 풍파를 오롯이 겪은 인물이자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이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조부모와 함께 서울로 온 그는 서울고 1학년 때 6·25전쟁을 맞았다. 어느 일요일 백화점에 갔는데 지프차가 돌아다니면서 ‘외출이나 휴가 나온 장병들은 속히 귀대하라’고 소리쳤다고 그는 그날을 회고했다. 다음 날 그는 쌀자루를 짊어지고 걸어서 충남 공주까지 피란을 갔다.

피란 시절 충남여고 예술제에서 연극을 보고 감명받은 그는 그때부터 연기를 독학하기 시작했고,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일 때 서울대 연극반을 재건해 활동했다. 1956년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고,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TV 방송국인 대한방송 드라마와 KBS의 첫 TV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했다. 그의 연기 인생은 대한민국 TV 드라마 역사의 처음부터 함께한 셈이다.

평균 시청률이 59.6%에 달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고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젊은 층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쌓았고 ‘꽃보다 할배’에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해 ‘꽃할배’ 신드롬까지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전양자와 멜로 연기를 선보이며 화제에 올랐다.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엔 러닝타임이 3시간 20분인 연극 ‘리어왕’에서 리어왕을 연기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모습에 젊은 세대들로부터도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2018년 ‘미투 운동’이 있던 때에는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버닝썬 게이트’ 등 연예인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해 “늘 겸손하라”고 꾸짖는 등 어른으로서 연예계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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