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토끼 이름 봉우리 찾았는데 산토끼는 어디 갔을까?
2023년은 계묘癸卯년, 검은 토끼의 해다. 우리 민화 속에서 토끼는 생장과 번창, 풍요의 상징이며 검은색은 지혜의 색으로 여겨진다. 또 명리학적으로 계묘는 조력자이자 행운의 신인 천을귀인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를 배려하고 노력하며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는 해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지혜를 갖추고 번성하길 빌어볼 수 있는 해인 셈이다.
기왕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할 것이라면 토끼의 자취가 남은 산을 찾아 빌어보는 건 어떨까. 지도를 펼치고 토끼癸卯의 이름이 남은 산들을 찾아봤다. 또 토끼를 닮은 명물바위와 이를 넘어 '진짜' 토끼는 왜 산에서 보기 어려워졌는지 그 이유도 알아봤다.
가장 높은 건 지리산 토끼봉
먼저 토끼의 이름을 품은 산을 보자.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총 14개의 산이 토끼와 관련된 지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중 등산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건 아마도 지리산의 토끼봉(1,534m)일 것이다. 이는 반야봉에서 방위가 묘향이라 하여 묘봉으로 불리다가 토끼봉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사실 그래서 동물 토끼랑은 딱히 관련은 없다. 여순 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온 빨치산들이 봉우리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대봉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리산을 종주하며 토끼봉을 지나본 이들은 알겠지만, 산행의 재미가 큰 곳은 아니다. 정상이 날카롭게 올라선 모양이 아니라 뭉긋해 봉우리다운 맛이 없다. 특히 화개재에서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이겨내고 만나는 봉우리인지라 그 아쉬움이 더 크다.
최근 산꾼들에게 인기가 높은 영남알프스에도 토끼봉(1,018m)이 있다.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솟은 토끼봉은 천황산의 북동쪽 능선과 이어져 있다. 주능선에서 살짝 벗어나 있지만 영남알프스의 중앙에 솟아 있어 한눈에 영남알프스를 돌아보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정상에는 밀양시 신묘생 연합회(6·25전쟁 이듬해 출생한 밀양 친목회)에서 2011년 12월 24일 세운 자그마한 정상석이 놓여 있다.
높은 산이 부담스럽다면 앙증맞은 토끼봉을 찾아도 좋다. 이 중에선 대전 대청호의 토끼봉(105m)이 유명하다. 토끼봉을 한 바퀴 둘러 돌아가는 흥진마을둘레길(토끼봉 둘레길이라고도 한다)은 약 3.1km로 대청호와 어우러진 갈대와 억새 풍광이 몹시 아름답다. 또한 세계 최장의 벚꽃길이라고 불리는 오동선 대청호 벚꽃길 26.6km도 토끼봉과 맞닿아 있으니 계절을 잘 골라 가면 꽤 만족스러운 트레킹이 가능하다. 단 대청호 토끼봉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따로 있지 않다.
속리산·치악산 토끼봉은 비법정
오를 수 없거나 명확한 등산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야트막한 동네 뒷산격인 토끼봉도 많다. 먼저 오를 수 없는 토끼봉은 속리산 토끼봉(748m)과 치악산 토끼봉(887m)이 대표적이다. 국립공원 경계 내에 비법정 탐방구간에 속한 산들이다. 이 두 봉우리는 과거에 인기 산행지였던 탓에 지금도 국립공원공단의 눈을 피해 관성적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속리산 토끼봉의 경우 오를 순 없지만 가까이서 바라볼 순 있다. 상학봉에서 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릉을 이용하면 된다. 아기자기한 암릉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미타사 기점으로 올라 운흥1리 마을회관 방면으로 내려서는 코스가 가장 애용된다. 완전한 원점회귀는 아니지만 비교적 차량 회수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토끼봉은 상모봉(772m)에서 북동쪽에 쫑긋 솟아 있으며, 능선 상에서 나무 사이로 곧잘 보인다.
치악산 토끼봉은 정상인 비로봉에서 삼봉, 투구봉으로 흘러나가는 서북릉 끝에 솟아 있다. 옛 월간<山> 기사에선 토끼봉 정상의 조망을 '동으로는 큰골 건너로 천지봉이 마주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사다리병창과 비로봉이 제법 장쾌하다. 비로봉에서 오른쪽인 남으로는 쥐너미고개와 감투봉, 삼봉, 낚시봉이 첩첩산중을 이룬다'고 묘사했다.
현재는 근처를 지나는 탐방로가 없다. 토끼봉 바로 턱밑으로 구룡사에서 시작하는 치악산둘레길 2코스가 지나지만 토끼봉을 명확히 바라보기에는 마땅치 않다. 그래도 비로봉에서 구룡사로 내려서는 길에서 비교적 훤칠한 능선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에서 봐도 토끼를 닮은 산
이외에는 명확한 등산로 정보가 나타나지 않은 야트막한 산들이다. 토끼를 닮은 산세를 지녔다고 하는 전남 화순군 사평면 검산리의 토끼봉(367m), 제주 오름 토산망(175m) 등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토산망은 토끼 같은 모양이라 토산봉이라 불렸으며, 대한제국 시절 외적이 쳐들어오는지 망을 보기 위한 봉화가 이곳에서 운용되면서 토산망 또는 망오름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순우리말 '토끼-'로 된 산은 많은 반면 토끼 뜻을 지닌 한자어가 붙은 산은 흔치 않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고시한 7414개의 산 지명 중에서 토끼 토兎자가 붙은 산과 토끼 묘卯자가 붙은 산은 각각 한 개밖에 없다.
먼저 토끼 토가 붙은 산은 전남 신안군 장산명 도창리 토미兎尾산(92m)이다. 한자 그대로 토끼의 꼬리 모양을 닮은 산이라고 한다. 지역 전승에 의하면 과거에 사찰을 지으려다 지리학자가 산세가 이롭지 못하다 해서 옮겼었는데 그후 한 노인이 풀을 베러 토미산에 올랐다가 불상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토끼 묘卯가 붙은 산은 묘봉卯峰(229m)이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와 안성시 양성면 노곡리 사이에 솟아 있는데 묘봉리란 마을 이름도 이 묘봉에서 나왔다.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이 토끼 모양으로 생겼다고 전해진다.
지난 2011년에도 이 산의 모습이 토끼를 닮았다고 화제가 됐었다. 옛 선조들이 하늘에서 묘봉을 내려다 봤을 리 없건만 국토부에서 신묘년을 맞아 항공에서 본 묘봉의 형태가 마치 토끼를 닮았다고 발표했었다. 당시 자료사진에선 정말 토끼의 모습이 얼핏 엿보인다. 현재 위성지도로는 산림이 우거진 탓인지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토끼 닮은 바위는?
산행 취재를 다니다보면 재미있는 모양의 바위를 자주 본다. 바위의 이름이 뭘까 궁금해 옛 산행기부터 최근에 올라온 블로그 산행기까지 살피다보면 같은 바위임에도 전부 제각각으로 부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지역 주민이나 과거 산을 답사한 산꾼들이 저마다 같은 바위에서 다른 생김새를 발견해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지자체에서 이런 바위들의 이름까지 고시하고 관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국토해양부에서 우리나라의 154만여 개의 지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를 보면 토끼바위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은 곳은 단 두 곳이다. 경남 밀양시 내이동의 토끼바위와 경북 영천시 신령면의 토끼바위가 그것이다.
이 중 밀양 토끼바위의 지명 유래가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진다. 내이동 신촌오거리에 위치한 이 바위에 토끼 이름이 붙은 데는 두 가지 속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 바위 두 개가 토끼 귀 모양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도로를 만들면서 한 개가 없어져 지금의 바위 하나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 선녀가 천태산에서 이 바위를 토끼 등에 싣고 다녔다는 것이다.
또한 밀양 토끼바위는 청동기시대 족장 무덤인 지석묘로도 추정되고 있다. 지역주민들은 성스러운 바위로 여겨 길일에 고사를 지내고, 숟가락으로 바위 표면을 긁어 먹으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산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토끼바위는 관악산에 있다. 서울대 방면에서 자운암능선을 오를 때 처음으로 만나는 기암이다. 토끼가 엎드려 있는 모양을 닮았는데 누군가 빨간색으로 눈까지 그려 넣어 더욱 실감이 난다.
또 북한산 의상능선 토끼바위도 유명하다. 귀가 양쪽으로 쫑긋 솟아 있는 이 바위는 난이도 높은 의상능선에서 처음으로 조망이 터지며 가슴이 시원해지는 포인트에 위치하고 있어 더욱 눈길을 잡아끈다.
이외에도 주작산, 속리산, 금강산 삼성산, 설악산, 원통산 등지에도 토끼바위가 존재하고 있다. 또 알려지지 않은 어딘가에 이들보다 더 토끼를 쏙 빼닮은 바위가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토끼를 닮은 산과 바위 대신 진짜 '토끼'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 1960~1970년대, 늦어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에선 산토끼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존재가 됐다. 그 많던 토끼는 다 어디로 갔을까?
산토끼 실종은 우거진 산림, 전염병, 밀렵 원인
전문가들은 주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먼저 너무 잘(?) 보전돼 울창해진 산림이다. 울창한 숲이 왜 산토끼한테 해가 되는 것일까? 2015년 한국자연환경보전협회 협회보에 강상준 충북대 명예교수가 남긴 글이다.
'산토끼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몸집이 작고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뜯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높이가 적당한 크기의 풀밭이 산토끼가 가장 좋아하는 서식지다.
연탄을 사용하기 이전 농촌에서는 주로 뒷산의 나무들을 베어다가 연료나 난방용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숲은 적당히 또는 심하게 교란돼 나무가 성장하기 어려웠고, 그 자리에 초본식물이 넓게 분포돼 있었다. 산토끼가 먹고 휴식하고 새끼를 낳는 최적의 서식지였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행해진 자연보호운동의 결과 민둥산이었던 야산도 울창한 나무숲이 됐다. 그 결과 하층식생의 형성이 제한돼 산토끼가 즐겨 먹는 어린 새싹 같은 식물의 종류와 개체수가 빈약해졌다.'
요컨대 산림보호운동이 오히려 산토끼의 번성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반도야생동물연구소 한상훈 소장은 두 가지 원인을 더 추가했다. 하나는 1980년대 유행한 토끼 전염병, 그리고 밀렵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토끼 출혈병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산토끼들이 상당히 많이 죽었어요. 당시에 전염병의 영향으로 안 그래도 개체수가 줄어드는데 공공연하게 올무 따위를 이용한 밀렵도 성행했고, 서식 환경도 수목이 우거지면서 갈수록 안 좋아지니 급감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한 소장은 토끼 개체 수 감소의 원인으로 들고양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기사를 찾아보면 들고양이가 산토끼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있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기에 의외였다.
"들고양이가 토끼를 사냥한 사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닙니다. 현재 들고양이들 대부분은 인근 마을의 민가 등지에서 먹이를 쉽게 얻어먹고 있어 먹이 활동을 위해 토끼를 사냥하는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거든요."
한편 이토록 얼굴 보기 힘들어진 산토끼, 찾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한 소장은 "적어도 해발 300m 이상, 주로 해발 600~800m 정도 되는 산악지형의 임도 주변을 잘 살펴보라"며 "햇빛을 잘 받고 초본류가 많이 사는 지형이면 산토끼를 볼 확률이 높다"고 조언했다. 만약 산토끼를 보게 된다면 먹이를 주거나, 위협하지도 말고 그저 잘 살길 빌어주자. 2023년의 주인공인 귀한 몸이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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