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펜상 「그날, 무대 위에서」 김세화 “숨겨진 지배와 피지배 관계, 우리에겐 의외로 많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회사 업무와 관련돼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많은 뮤지컬 공연을 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 하나가 문뜩 자라났다. 언젠가 작은 공간 안에 현실 세계를 집어넣고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를 말하는 무대 공간을 문학적으로 그려보리라. 일상과 연극 사이를 오고가고,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모호한 의식 세계를. 지난해 봄, 김세화 작가는 오랜 만에 대구 대명동에서 소극장 공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연 시스템이 첨단화돼서 연극 무대가 옛날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명을 비롯해 많은 부문이 컴퓨터로 이뤄졌다. 소극장에서 관객들이 울고 웃을 때, 그는 조명과 무대 장치를 보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무대와 내용, 관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공연 뒤에는 관계자를 찾아가 묻기도 했다.
단편 추리소설 「그날, 무대 위에서」는 일요일 오후 한 연극 전용 소극장에서 젊고 매력적인 스물여섯 남배우 백영진이 천장 철제 구조물에 걸려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경찰은 한동안 특별한 타살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살로 기우는 듯하지만, 형사과장 오지영이 백영진의 휴대폰에서 자살을 예고한 통화 파일을 확인한 뒤부터 본격 수사로 선회한다. 현장 및 피해자 주위 인물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수록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커져가고, 백영진을 사랑한 공연기획사 신수연과 연극 지도교사 유은성의 놀라운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저를 지배했어요. 제 영혼까지 지배했어요. 끊임없이 요구하고 지시하고 빼앗았어요....장난감처럼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으니까요. 처음엔 호기심으로 저를 건드리고, 다음엔 소유하고 지배했어요.”(73쪽)
황금펜상 심사위원들은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는 수사 과정을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 및 입체적인 조명을 통해서 구체화해나가는 섬세한 서사적 건축 과정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며 “범행에 대한 촘촘한 구성뿐만 아니라, 인물의 심리적 동기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적 답변을 제시했다”고 호평했다.
대구 MBC에서 32년 넘게 기자로 일해 온 김 작가는 2019년 단편 추리소설 「붉은 벽」으로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안식년을 맞아 이듬해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써왔다. 2021년 장편 추리소설 『기억의 저편』을 발표해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작가라는 타이틀 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을 받고, 다시 황금펜상을 과분하게 받으면서, 이젠 본격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앞으로 기자나 여성 형사과장, 파출소 순경 시리즈 등 다양한 시리즈물을 계속 쓰고 싶군요.”
제16회 황금펜상 수상작인 「그날, 무대 위에서」와 우수작 6편을 묶은 『2022년 황금펜상 수상 작품집』(나비클럽)이 최근 출간됐다. 1985년 제정돼 16회째를 맞은 ‘황금펜상’은 ‘한국의 에드거상’을 표방하며 뛰어난 국내 단편 추리소설을 대상으로 상을 수여해 왔다. 이번 심사 대상은 2021년 11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문예지와 단행본 등에 발표된 단편 추리소설들. 예심은 『계간 미스터리』의 편집위원인 윤자영, 조동신, 홍성호, 한새마, 박상민, 김재희, 한수옥이, 본심은 문학평론가 백휴, 박광규, 박인성이 각각 진행했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까마귀들은 탐욕스런 검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런 봉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내 다시 내려앉아 시체 위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봉래가 힘없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산이라는 남자는 이런 광경에 익숙한지 담담해 보였다. ‘이것이 전쟁이오.’”(199쪽)
유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장면과 이야기를 직조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수레에 깔린 사무라이 야마모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윌리엄 월레스가 언뜻 떠오를지도.
한국의 ‘셜리 잭슨’을 꿈꾼다는 박소해 작가의 「겨울이 없는 나」는 폭설이 내린 제주도를 배경으로 끔찍한 범죄를 추적해 나가는 작품이다. 어느 새벽 폭설로 온통 백색인 서귀포시와 제주시를 잇는 지방도에서 7년 전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훔친 김무극이 피를 흘린 채 발견된다. 좌승주 형사와 파트너 양주혁 형사는 현장에서 멀지 않는 언덕에서 공범 강우빈이 숨진 것을 확인한다. 좌승주 형사 일행은 피해자 김무극이 윤성욱이라는 사람으로 행세해온 것을 확인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 간다.
강렬한 범죄 현장 구성이나 2인조 좌승주 양주혁 형사의 모습은 다소 익숙할 수 있지만, 범죄를 추적하고 진실을 풀어가는 과정의 밀도나 호흡 유지는 수준급이다. ‘좌승주 형사 시리즈’ 가운데 한 편.
소설적 구성과 주제 의식이 돋보이고, 일상 미스터리가 줄 수 있는 쾌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소설을 읽고 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힘든 것이냐는 소녀의 물음에 ‘나’가 했던 대답이 뇌리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면을 벗는 걸 싫어하거든. 남에 의해서는 더더욱.”(276쪽)
소설집에는 이밖에 생명을 잉태한 ‘마더(mother)’이자 자신과 자식을 죽이려는 ‘머더(murder)’ 이야기를 담은 한새마의 「마더 머더 쇼크」,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낙서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박상민의 「무고한 표적」, 천진무구한 아이의 악의를 파헤치는 홍정기의 「무구한 살의」 등 우수작이 담겨 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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