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팔고 땅 팔아도 "월급은 어쩌지"…'귀빈 대접' 바이오의 추락
#2020년 국내 유수 의과대학의 교수가 설립한 항암치료제 개발 바이오벤처 A사는 최근 법인을 청산했다. 2018년 설립한 항암치료제 개발 바이오벤처 B사는 추가 투자를 받지 못하면 반년을 버티기 힘든 위기 상황이다. 의약품 소재 기업으로 설립 20년 이상이 지난 바이오벤처 C사는 최근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에 있는 부동산을 처분했다.
■ 자금줄 막히고 IPO도 안 되고…바이오벤처가 위험하다
바이오벤처가 무너진다. 미래산업 허리가 끊어진다. 바이오에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는 바이오는 투자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IPO(기업공개)는커녕 투자유치도 힘들어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 인력을 줄이고 파이프라인 연구를 중단하고 남은 직원 급여가 밀린다. 핵심 연구 인력마저 이탈한다. 국내 바이오벤처의 현주소다.
실제 2022년 바이오벤처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탈(VC)의 바이오 투자는 급감했다. 벤처캐피탈의 업종별 신규 투자 비중을 보면 바이오는 16.3%로 5년 만에 20% 밑으로 떨어졌다. 매년 늘던 벤처캐피탈의 바이오 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줄었다.
한 해 10개 이상의 바이오가 상장하던 IPO 시장에서 올해 눈에 띄는 신규 상장 신약 개발 바이오는 보로노이, 에이프릴바이오, 샤페론 정도다. 이들 모두 상장 가치를 예정보다 한참 낮췄는데도 공모시장에서 흥행에 참패했다. 그만큼 2022년 바이오는 장외에서 투자 유치도 힘들고 공모로 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려웠다.
국내 대표적 바이오 투자 전문가로 꼽히는 구영권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최근 바이오벤처 중 돈이 없어 인력을 줄이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70%까지 인원을 감축한 사례도 있다"며 "파이프라인 개발도 핵심적인 2개 정도만 남기고 다른 물질은 정리하는 식으로 비용을 아끼는 회사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운영자금이 없어 급여가 한두 달 밀리는 기업도 꽤 있다"며 "최악의 경우 바이오벤처의 50%가 위기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 바이오벤처가 우리 산업에서 갖는 의미는?
바이오는 대표적인 미래산업이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인류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필연적으로 지속 성장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나라에선 전 세계 바이오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방위적 투자와 지원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바이오 행정명령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바이오는 이제 주요 나라의 명실상부한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2021년 세계 의약품 시장 시장 규모는 약 1조2805억달러(약 1644조원)로 전년 대비 9.4% 성장했다. 2021년 전 세계 의약품 R&D(연구개발) 비용은 2374억달러(약 305조원)로 전년 대비 약 14% 증가했다.
단순히 산업 이상의 의미도 갖는다. 한 나라의 바이오 기술 역량은 국민 건강과 직결된다.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과정에서 불거진 백신 및 치료제 패권 다툼을 전 세계가 지켜봤다.
서구권 선진국 위주의 다국적 제약사가 주도권을 쥔 글로벌 바이오 시장에서 우리나라는 다양한 바이오벤처의 활발한 연구개발(R&D)을 통해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물론 삼성, SK 등 대기업 역시 바이오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역량을 갖춘 바이오벤처의 동반 성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벤처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러다 다 죽는다"는 토로가 곳곳에서 나온다. 주식시장에서 바이오의 시장가치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폭락했고, 투자업계에선 바이오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나마 상장 바이오는 CB(전환사채) 같은 자금조달을 위한 선택지가 있다.
더 문제는 비상장 바이오벤처다. 유동성이 바닥나 운영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하루 앞을 내다보기 힘든 바이오벤처가 늘고 있다. 1년을 버틸 자금이 없어 감사의견 거절을 받거나 조금이라도 버티기 위해 부동산을 파는 바이오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운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력을 감축하고 개발하던 파이프라인 연구를 중단하는 사례도 속출한다.
최용석 아주IB투자 상무는 "이미 벤처캐피탈 등의 투자를 받은 비상장 바이오벤처 중 후속 투자 유치를 못해 생존의 기로에 선 기업이 적지 않다"며 "새해에도 바이오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살아남기 위해 절실하게 비용을 감축하라는 조언을 바이오벤처에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코스닥 준비생 코넥스 바이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코넥스 시장은 2013년 7월 코스피, 코스닥에 이은 제3시장으로 주목받으며 문을 열었다. 코스닥 준비생을 위한 예비 증권시장이라 볼 수 있다. 코넥스 바이오의 현황은 바이오벤처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정표로 의미가 있다.
미래가치를 앞세운 바이오는 코넥스 시장 개장 뒤 항상 주요 업종으로 활약했다. 한때 코넥스에서 시가총액 1조원을 넘은 기업도 바이오다. 시가총액이 수천억원에 달하는 바이오가 코넥스에 수두룩했다.
하지만 최근 코넥스 대표 바이오의 위상은 몰라보게 추락했다. 코넥스에서 시가총액 2000억원을 넘는 바이오는 하나도 없다.
2022년 코넥스 신약 개발 바이오 중 코스닥 이전상장 도전(상장심사 청구)에 나선 기업이 한 곳도 없단 사실은 상징적이다. 2021년만 해도 에이비온, 에드바이오텍, 툴젠, 선바이오가 잇따라 코스닥 상장심사를 청구했고 이전상장에 성공했다.
오히려 바이오시네틱스 중 일부 코넥스 바이오는 계속기업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단 이유로 감사의견 거절을 받고 상장폐지 위기에 내몰렸다.
실제 올해 여러 비상장 바이오벤처가 자금 문제 등으로 2021년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 거절로 시름을 앓고 있다.
코스닥 상장이 눈앞이라 여긴 코넥스 주요 바이오의 현실은 암담하다. 코넥스 대표 바이오 중 하나인 노브메타파마는 여러 차례 코스닥 이전상장에 실패하면서 적자가 지속되는 가운데 급기야 2021년 말 기준 자본잠식에 빠졌다.
대부분의 코넥스 주요 신약 개발 바이오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가치 하락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법인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 코넥스 바이오 D사는 2022년 상반기 시리즈C 투자유치를 추진하던 중 투자업계의 바이오 기피 현상으로 자금조달에 실패했다. 주요 기술 개발 일정에 차질을 빚으며 운영에 어려움이 가중됐다. 다행히 정부 과제를 받아 일부 운영에 숨통이 트였다.
여러 코넥스 바이오가 자금조달, 기술개발, 코스닥 이전상장 등 핵심 계획이 지연되면서 기업 영속성에 물음표가 붙었다. 투자자 불안도 커지고 있다.
■ "임상 지연·파이프라인 축소로 미래 경쟁력 잃을까 우려"
많은 바이오벤처가 입을 모아 "투자 받기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다. 신약이나 기술을 개발하려면 연구 인력이 필요하고 임상 비용도 필요하다. 하지만 투자를 받지 못하니 연구가 진척되지 못하고 회사의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핵심 인력이 이탈한다. 악순환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바이오 기업 대표는 "바이오 투자가 극도로 위축된 배경으로 IPO가 막혀 투자자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통로가 막힌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며 "상장 바이오 중 일부 기업이 사고를 치면서 IPO 기준이 깐깐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실제 많은 바이오벤처가 자금이 없어 주요 파이프라인의 임상을 대행하는 CRO(임상시험수탁기관)에 비용을 대지 못해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며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줄이고 일부 파이프라인을 접고 연구개발이 아니라 경비를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금리와 환율 문제로 2023년에도 나아질지 장담하기 어렵단 게 더 큰 문제"라며 "지속적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파이프라인을 확보하지 못하는 지금의 구조로는 바이오 산업 경쟁력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지금의 위기를 자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단 조언도 눈길을 끈다.
김재준 미래에셋벤처투자 전무는 "지금이 바이오벤처의 위기 상황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계기로 부실 또는 한계 기업은 퇴출되고 기술 경쟁력을 갖춘 기업 위주로 시장이 재편된다면 오히려 바이오 생태계의 건전성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우리나라 바이오벤처는 소규모 기업 위주로 각 회사별로 연구 인력이 잘게 쪼개진 경향이 있다"며 "예를 들어 100명의 연구 인력이 모여야 하는데 10개 회사에 10개 연구 인력이 분산된 구조라고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 역량이 여러 회사에 흩어져 일부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다"며 "향후 M&A(인수합병)나 인력 이동 등으로 경쟁력을 갖춘 연구 인력이 힘을 합치는 구조로 바이오벤처 산업 지형이 바뀐다면 K-바이오의 개발 역량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바이오의 가치 평가는 일단 반 토막 나고 시작한다. 그래도 선뜻 투자하기 쉽지 않다."(바이오 전문 투자회사 임원 A씨)
A씨의 이 같은 한탄은 최근 투자 업계에서 바이오의 입지가 어떤지 대변한다. 불과 2020~2021년만 해도 바이오란 간판만으로 상장·비상장을 가리지 않고 투자 시장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격세지감이다. 연구를 위한 자금 조달은커녕 당장 직원들 월급을 못 줄까 걱정하는 기업이 줄을 잇는다.
■ 매년 늘던 바이오 신규 투자, 2022년 전년대비 27%↓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22년 3분기까지 벤처캐피탈(VC)의 바이오 신규 투자금액은 898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감소했다.
벤처캐피탈의 바이오 신규 투자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다. 2018년 8417억원, 2019년 1조1033억원, 2020년 1조1970억원, 2021년 1조6770억원이다. 2022년 바이오의 투자 매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실감할 수 있다.
2022년 투자 업계의 바이오 외면은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바이오는 2015년 한미약품의 대형 기술수출로 투자 업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지속 성장할 차세대 산업으로 부각됐고,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맞물려 기대감이 증폭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업의 연구 실패 사례와 경영진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내부통제 문제가 불거지며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여기다 팬데믹 시기 급격하게 치솟은 기업가치에 대한 고평가 우려가 고개를 들었다.
더구나 미국발 금리인상으로 자본시장이 경색되자 대표적 고위험 투자 분야로 꼽히는 바이오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기업가치는 급락했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재준 미래에셋벤처투자 전무는 "국내 바이오벤처는 미래 산업으로 고평가를 받다 경기 침체와 맞물려 장밋빛 기대감이 수그러들며 투자 유치가 어려워졌다"며 "일부 기업의 부정적 행태를 보며 '바이오는 다 사기 아니냐'란 인식이 팽배해졌고, 실적을 내는 다른 업종의 기업가치까지 폭락하는 과정에서 기대감이 사라진 바이오의 투자 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바이오 IPO 험난…회수시장 얼어붙었다
바이오에 투자하기 어려운 배경으로 투자금 회수가 어려운 시장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엑시트(투자금 회수)가 어렵다보니 투자 업계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대접을 받던 바이오는 어느새 '미운 오리 새끼'가 됐다.
2022년 IPO(기업공개) 시장에서 바이오는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2022년 IPO에 도전한 바이오기업 대다수가 원래 기대했던 수준보다 훨씬 낮은 기업가치를 책정해도 공모 시장에선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한국거래소의 상장 심사를 통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공모 시장의 저조한 투자 수요 때문에 상장을 연기한 기업도 여럿이다. 그나마 업계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 일부 바이오가 울며 겨자먹기로 몸값을 대폭 낮춰 코스닥 입성에 성공했다.
올해 신규 상장 바이오 중 공모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그나마 상장에 성공한 샤페론, 루닛, 선바이오는 수요예측 경쟁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에이프릴바이오는 14.43대 1, 보로노이는 28.35대 1이다.
그마저도 IPO에 나선 대부분의 바이오가 희망공모가밴드 범위 하단보다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50%까지 낮은 가격으로 공모가를 확정했다. 일부 기업은 비상장 시절 장외에서 인정받은 기업가치보다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상장했다. 일부 투자기관은 투자한 바이오가 상장했는데도 손에 남는 수익이 없는 셈이다.
새해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 10대 투자은행 중 8곳이 내년 경기침체를 전망했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가 새해에도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강조하며 긴축 장기화를 예고했다. 국내에선 기대를 받던 모태펀드 예상 증액이 무산됐다. 바이오의 대표적 상장 수단인 기술특례 요건 체계 개편이란 변수도 있다.
이 때문에 후속 투자를 받지 못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바이오가 벼랑 끝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살기 위해 파이프라인 축소부터 구조조정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국 운영자금 없인 단기 방편일 뿐이다.
최용석 아주IB투자 상무는 "무엇보다 회수가 잘 돼야 투자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딜(거래)도 볼 텐데 지금처럼 바이오가 상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지속되면 바이오벤처 자금경색은 나아지기 힘들다"며 "다만 최근엔 각 파이프라인에 대한 가치평가를 보다 객관적으로 한다든지, 기술 경쟁력을 갖춘 기업 위주로 상장한다든지 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시장 분위기가 살아난다면 연구 역량이 있는 바이오벤처는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호 데일리파트너스 대표는 "최근 벤처들의 어려운 분위기는 꼭 특정 업종에 국한된 건 아니지만 바이오만 놓고 봤을 때 분명 원죄가 존재한다"며 "상장했던 바이오기업이 불미스럽게 상장폐지되거나, 기대를 모았던 파이프라인의 임상 실패, 횡령 사태 등이 누적되면서 투자자 신뢰를 훼손한 점이 투자 업계의 외면을 받는 한 이유"라고 말했다.
#파멥신은 3년간 진행한 재발성 교모세포종 신약 후보물질의 호주 및 미국 임상 2상을 2022년 중단했다. "임상 완료 때까지 상당한 추가 자금을 투입해야 해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검토한 후 조기 임상 종료를 결정했다"는 게 회사가 밝힌 사유다. 파멥신은 2008년 설립됐지만 아직 연간 1억원의 매출을 올리지 못한다. 매년 적자만 수십억~수백억원 낸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R&D(연구개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믿어준 투자자 덕분이다.
신약 개발은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최종 허가까지 통상적으로 10년 이상 걸린다. 이 과정에서 드는 비용만 평균 1조원에 달한다. 바이오 산업은 당장 돈을 벌지 못하면서 연구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특성이 있다. 어느 산업보다 외부 투자 유치가 중요하다. 이러한 특성은 시장 불확실성, 고금리 기조 장기화 등으로 투자가 얼어붙은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바이오벤처의 발목을 잡았다. 파멥신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바이오가 한두 곳이 아니다.
먹거리로 키우던 파이프라인을 포기하는 게 대표적이다. 2022년에만 총 21건의 임상 철회, 조기 중단 공시가 나왔다. 이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파이프라인은 코로나19(COVID-19) 백신, 치료제 후보물질이다. 종근당, 크리스탈지노믹스, 셀리드, 대웅제약 등 10건에 달한다. 지놈앤컴퍼니, 박셀바이오, 엔지켐생명과학 등도 비주력 파이프라인을 정리했다. 각 기업은 비용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 표현한다. 대부분 '비용 대비 기대효익이 낮다'는 근거를 내세웠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환자 모집이 안 됐고 임상은 지연됐다"며 "엔데믹이 되면서 사정이 나아지나 했지만 금리가 오르면서 가만히 있어도 비용이 4분의 1 더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자금경색까지 시작됐다"며 "파이프라인 4~5개를 2개 정도로 줄여 비용을 줄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력 구조조정 역시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진단키트 업체 씨젠은 2022년 3월 말 인원이 1187명이었지만 9월 말 1053명으로 11% 줄였다. 한 바이오 회사 대표는 "연초 인력을 20명 추가하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하반기 상황을 보니 위험하단 판단이 들어 채용에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이오 전문 벤처캐피탈(VC) 관계자는 "지금 인력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월급이 1~2개월 밀려서 직원들이 먼저 회사를 관두기도 하고, 회사에서 퇴사를 설득하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설비, 건물 등 자산을 팔거나 출장비 등 경비를 줄여 자금 여력을 키우는 사례도 많다. 파이프라인, 인력을 줄이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다는 판단에서다. 다른 바이오 회사 대표는 "인건비를 줄이는 게 쉽지 않다 보니 R&D 비용만 남기고 회식비, 출장비 등 경비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 기업은 아니지만 헬스케어 기업인 케어랩스는 본사로 쓰던 서울 강남 건물과 토지를 매각해 950억원을 확보했다. 지난해 매출 감소, 순적자 전환을 겪은 만큼 손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아예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는 기업도 나왔다. 아이큐어는 2022년 하반기 지분 투자한 회사 4분의 1에 대한 청산에 나섰다. 화장품 판매, 구독 플랫폼 운영 등 사업을 하던 회사 4곳이다. 아이큐어 관계자는 "연구 성과가 나지 않고 이익 발현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곳들을 정리하는 것"이라며 "모회사 역량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효율성 개선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큐어는 2018년 이후 줄곧 영업적자를 기록했고, 최근 2년간 매출마저 악화됐다. 손익구조 개선이 시급하다.
문제는 바이오 벤처의 이 같은 자구책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단 것이다. 한 바이오벤처 대표의 "R&D는 돈 없으면 못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바이오의 긴축재정이 지속되면 결국 국내 신약 파이프라인 경쟁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대표는 "바이오 회사들이 지금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인력비와 같은 고정비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사실 이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안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기업, 나아가 산업에도 좋진 않다"고 지적했다.
김도윤 기자 justice@mt.co.kr, 박미리 기자 mil05@mt.co.kr, 정기종 기자 azoth4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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