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노조전임자가 회사 월급 받는 것은 잘못"

윤근영 2023. 1.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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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은 비정규직 근로조건 개선에 진솔하게 나서야 한다"
"유학시절 북한 가자는 제안 많았다…김일성과 면담도 제시"
"과거 국정원, 인혁당 관련자 여성 가족 흥분제로 고문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전순옥 [촬영 정한솔]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전순옥(69)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다. 그는 전태일 열사 분신 후 5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전태일기념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노동운동이 건강해지려면 노조 전임자가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노조 일만 하는 사람은 회사가 아닌 조합원들로부터 급여를 받는 게 맞다고 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이 일정 수준의 임금을 보장받는 과정에서 희생되고 있다고 했다. 정규직이 진솔하게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국 유학 시절에 북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방북을 제안한 사람들은 김일성과의 일대일 면담도 이미 약속돼 있다면서 자신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1987년 청계노조 사무실 반환을 요구하다 전경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실신, 이대부속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있는 전순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1954년 부산에서 태어난 전순옥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오빠의 분신 사망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아 졸도했다. 이후 어머니 이소선(작고)과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1977년 9월 9일 청계노조의 노동교실 되찾기 투쟁에서 4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투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노동 현장을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하다 1989년 외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밟아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자와 민주노조운동을 위한 그들의 투쟁'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한국을 방문, 150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12년 만에 귀국한 그는 노동운동 관련 일에 계속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성공회대 교수, 민주정책연구소 부설 소상공인정책연구소장,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의원 등을 지냈다.

전순옥의 오빠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평화시장 옷 공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참혹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22세에 불과했던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불태웠다. 동료들은 그 불길에 아무 쓸모가 없었던 근로기준법 책을 던졌다.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배고파하는 어린 시다(보조원)들에게 버스비로 풀빵을 사주고는 도봉구 쌍문동 집까지 30리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시다들을 대신해서 혼자 공장에 남아서 청소를 하기도 했고, 시다가 아프면 약국과 병원으로 뛰어가곤 했다. 추위에 떠는 걸인을 만나면 옷을 벗어주고는 벌벌 떨면서 집으로 가기도 했다.

2000년 10월 전태열 열사 30주기 추모기념식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진행하는 노동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 나는 아버지(전상수)를 많이 좋아했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고기 잡으러 갈 때도 친구분들은 모두 아들을 데리고 갔으나 아버지는 딸인 나를 데리고 갔다. 가족들이 떨어져 살던 당시 아버지와 나는 광장시장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잤다. 그 하숙집은 여러 아저씨가 함께 있는 곳이어서 그 틈에 끼어 자야 했는데, 어린 나(초등학교 입학 무렵)의 몸에 다른 어른 남자의 몸이 닿을까 봐 밤새도록 팔로 내 몸 둘레에 원을 만들어 방어하고 계셨다. 나 때문에 주무시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극장에도 많이 갔다. 주로 길음동의 미도극장이었다. 영화를 본 뒤에 버스 타고 돌아오면서 나도 김지미, 윤정희같이 예뻐져서 영화배우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배우는 본인이 슬플 때나 행복할 때나 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서 "우리 딸은 배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전태일 평전을 보면 아버지가 자주 술을 마시고 가출을 반복했다는데.

▲ 아버지의 단점이 실제보다는 과장됐다.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작고)한테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인데, 책에서는 왜 그렇게 깎아내렸냐고 했다. 조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을 쓸 때 어머니로부터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으신 것 같다.

아버지는 4·19 이전에는 상당히 성실한 분이었다. 남대문시장 대도백화점 2층에 아버지 옷 공장이 있었고, 어머니는 1층 가게에서 옷을 팔았다. 당시에는 우리 집이 남대문시장에서 원피스 수영복을 가장 잘 만들었고 제일 많이 팔았다. 아버지는 수영복 외에 중고생들의 동복과 하복도 만들었는데, 옷을 주문했던 선생님들이 4·19혁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후에 감옥에 가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됐고.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아버지는 오빠가 분신하기 전해인 1969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병은 없었고 건강하셨는데,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 같다.

1987년 7월 노조원들이 경비경찰을 기습, 청계노조 사무실을 탈취하자 이소선이 달려와 노조원을 격려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는 안 좋았나.

▲ 어머니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린 나한테 숙제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놀라고 했다. 공부를 잘해서 똑똑해지면 안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평소에 어머니로부터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을 할 때 어머니는 말에 조리가 있고, 잘 따지는 스타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말 상대가 안 돼서 주눅이 드신 것 같았다.

-- 이소선 평전을 보면,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버지를 싫어한 것 같은데.

▲ 전통 혼례 첫날부터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결혼 전에 어머니는 사모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마을 근처에서 사방공사를 하면서 집에 물 뜨러 자주 왔던 사람이었다. 20년 전 내가 영국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나한테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를 묻고는 "나는 사랑하던 사람과 결혼을 못 해서 평생 후회했는데, 너는 사랑한다면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다.

-- 전태일이 숨진 후에 어머니가 노동청장(현 고용노동부 장관) 목덜미를 물어뜯었다고 하던데, 다혈질 성격인가.

▲ 노동청장이 병원에 찾아와서는 "돈을 받고 장례식을 빨리 치르라"고 회유하니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는 당국 쪽에서 가져온 돈 가방의 지퍼를 열고 돈을 바닥에 뿌리고는 "나는 돈이 싫다"면서 청소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갖고 가라고 하셨던 일이 기억난다. 어머니 성격이 불같기는 하다.

-- 어머니가 원래 리더십이 있었던 분인가.

▲ 어머니는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면 늑대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친구들이 옷고름을 서로 묶도록 해서 개별적으로 뛰어나가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겁먹지 말고 손을 잡은 채 뭉쳐 있으면 늑대가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섬세하면서도 용감했다. 아버지는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1988년 11월13일 전태일 기념일에 연세대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 큰오빠 전태일은 어떤 사람이었나.

▲ 일요일에 큰오빠, 작은 오빠(전태삼), 나, 여동생(전태리) 4명이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녔다. 큰오빠는 막내 태리(당시 이름은 순덕)를 업고, 나와 작은오빠는 도시락을 둘러메고는 한강 뚝섬, 세검정 등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소라를 잡기도 했다. 그때는 물이 참으로 맑았다. 하루는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돈을 주웠다. 오후 5시쯤이니 물놀이를 한 우리로서는 상당히 배가 고팠기에 나는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도 사고, 번데기도 사 먹자고 했다. 오빠는 잠시 생각하다 급하게 걸어가더니 어떤 곳에 쑥 들어갔다. 알고 보니 파출소였다. 오빠는 그 돈을 파출소 아저씨한테 넘겨줬다. 나는 울면서 다시는 오빠와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 오빠가 노래를 자주 불러줬다고 하던데.

▲ 큰오빠는 노래를 못했다. 박자를 못 맞췄다. 그런데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앞에서 막춤을 추곤 했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 친구, 아버지 친구,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 앞에서 오빠는 자기가 읽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중간에 노래도 한번 불러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재미있어했다. 그러다 오빠는 갑자기 아나운서 목소리로 바꿔서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공장 상황을 설명하곤 했다. 오빠가 분신했을 때 당국은 전태일이 깡패들과 몰려다니면서 패싸움을 벌이다 죽었다고 선전했는데, 동네 사람들 아무도 믿지 않았다. 평소의 오빠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오빠는 쌍문동 집까지 뛰어가곤 했다는데.

▲ 오빠는 마라톤을 잘했다. 집에 돌아갈 차비로 풀빵을 사서 시다들에게 나눠줬기에 오빠는 나만 버스에 태우고 집까지 뛰어갔다. 내가 창동역에 내리면 밤 11∼12시가 됐는데, 오빠가 뛰어서 도착할 때까지 서서 기다리곤 했다.

전태일이 쓴 일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

▲ 당시 나는 16세였다. 단성사 아래 양복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심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분신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었다. 오빠가 분신자살한 줄은 전혀 몰랐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오빠 친구 김영문이 찾아와 오빠가 많이 다쳤다며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 오빠가 분신 전인 11일 밤에 집에 왔었는데, 분신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안 했나.

▲ 나는 눈치를 전혀 못 챘다. 당시 야간 중학교에 다녔는데, 옷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는 학교 월사금을 모두 내지 못했다. 12일 아침에 오빠가 옷을 챙겨 입고 나가기에 같이 밥을 먹던 나는 쫓아나가서 "오빠, 학교 월사금 언제 줄 거야?"라고 물었더니 오빠는 나의 등을 두들겨주면서 "며칠만 기다려주면 오빠가 꼭 해줄게"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오빠와 헤어졌다. 오빠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너무너무 미안하다.

-- 어머니 이소선은 자신의 머리털을 팔아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데 필요한 돈을 전태일에게 줬다고 하는데.

▲ 오빠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젊은 시절 공장파업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노동운동은 위험하니 나서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나 오빠는 듣지 않았다. 오빠는 어머니한테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돈을 줬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일을 크게 자책하셨다. 자신이 그 책을 사줘서 아들이 결국 숨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곳에서 1984년 전순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 1977년 '9.9 투쟁' 당시 투신을 시도했는데.

▲ 그때 어머니가 구속돼서 항의하고 청계노조가 운영했던 노동 교실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나는 20대 중반이었고 다른 노조원들은 나보다 어렸다. 경찰과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남자 조합원들이 칼로 배를 긋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나는 "너희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면서 웃옷을 벗고 4층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옷을 벗은 것은 경찰이 옷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몸을 던졌는데, 그 순간 남자 조합원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끌어올려서 방에 가뒀다. 그다음에는 이미경이라는 조합원이 "전태일은 남자였으니 이번에는 여자가 해야 한다"면서 뛰어내렸는데, 마찬가지로 조합원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 오빠의 분신 이후 당국의 미행이 많았나.

▲ 경찰들이 계속 따라다녔다. 쌍문동 우리 집 앞에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경찰들이 그곳에서 항상 대기했다. 내가 나가면 그들은 바로 쫓아오니 항상 같이 다니는 셈이었다. 내가 경찰을 따돌리면 그들은 나중에 "상관한테 야단맞았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 회유도 있었나.

▲ 어머니는 390차례나 경찰에 연행됐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에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구류를 살곤 했다. 어머니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구속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은 나를 찾아와서는 "(수배 중인) 장기표의 여자 친구인 조무하를 만나서 장기표 근황에 관해 슬쩍 물어보라"고 하면서 이 요구를 들어주면 어머니 징역형 20년을 완전히 없애주겠다고 했다. 물론 거절했다.

-- 어머니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당하지는 않았나.

▲ 고문을 직접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혁당사건 당시 그 가족 중 여성분이 조사를 받을 때 음료수를 받아 마셨는데, 흥분제가 들어 있었다고 기독교회관 예배에서 증언했었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고문 방식이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어머니는 조사과정에서 주는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수세식 화장실에 있던 물을 고무신으로 퍼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1년 이석규 열사 장례위원장 당시의 이소선 [연합뉴스 자료사진]

-- 영국 유학 시절 북한에 가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 처음에 영국에 가서 랭귀지(언어) 코스를 밟고 있을 때 '코리안 프렌드십'이라는 모임에 갔다. 그곳에 가보니 변호사이거나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기자, 교수 등 지식인들(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모임 회원들이 매년 한 번씩 북한에 갔다 오는데, 함께 가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스위스 등을 통해 북한에 가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1989년 4월에 독일 금속노련의 초청으로 독일에 간 적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인들의 초청으로 저녁을 먹게 됐다.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나를 만나러 와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들은 김일성과 만나는 약속이 돼 있다면서 북한에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북한에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장소와 날짜까지 제시하면서 내가 김일성과 일대일로 만난다고 했다. 나는 그런 행위는 한국의 민주 노동운동을 망치는 행위라면서 거절했다.

-- 전태일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접촉해온 것인가.

▲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제안을 했다. 내가 북한에 가면 (전략적으로) 북한 정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은 비슷한 시도를 많이 해왔다. 내가 1988년도에 일본연합노조 초청으로 일본에 (순회 강연하러) 갔을 때도 재일교포(조총련) 쪽에서 나에게 돈을 주려는 시도가 있었다. 박스를 선물로 받았는데, 손수건 아래로 돈뭉치들이 있었다. 돌려주고 엄중히 경고했는데도 나중에 식당에서 돈을 건네는 사람이 또 있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위 [연합뉴스 자료사진]

-- 노조 지도부의 귀족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다른 나라에는 회사 일을 안 하는 기업노조 전임자에게 사용주가 월급을 주는 일이 없다. 한국에서 전임자에게 월급을 주는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노동자들이 요구해서가 아니다. 박정희가 쿠데타 후에 산별노조위원장을 지명하고 중앙정보부에 데려다가 반공교육을 하고는 위원장을 하도록 했다. 이들에게 월급을 줬는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진행하면서 노조를 컨트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노총의 기반이 됐다.

나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의 단병호, 권영길에게도 노조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노조 전임자들이 회사측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것을 끊으라는 요구였다. 사용주로부터 월급을 받는 노조위원장이 어떻게 조합원들을 대변하겠는가. 노조위원장과 사무장 등 전임자들의 월급은 조합비로 줘야 한다. 회사 일을 하지 않는데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노조가 당당하게 일을 할 수 있고 회사측과 야합하지 않게 된다.

-- 비정규직은 정규직노조와 경영진의 담합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맞는 이야기다. 조선소에 가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용접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밖에 안 된다. 회사 측은 이런 방식으로 정규직의 임금인상 요구에 맞춰주는 것이다. 회사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 할 때 정규직이 반대한다. 정규직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비정규직을 끌어안아야 한다. 정규직은 진솔하게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

--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가장 집중할까.

▲ 우리 사회에는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정규직은 이미 조직화돼 있는 사람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죽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복지가 잘 돼 있는데도 이를 이용하지 못해서 귀중한 생명이 죽어간다. 현장에서 일하다 안전 문제로 죽는 사람도 많다.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연합뉴스 인터뷰 중인 전순옥 [촬영 정한솔]

-- 어떤 취미가 있는가.

▲ 집 청소가 취미다. 집을 이쁘게 해놔야 하고, 정돈돼 있어야 하는 성격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차를 마셔도 분위기 있게 마시고 싶다. 어린 시절 노동운동을 하는 오빠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그분들 옷을 내가 모두 빨아서 아침에 입고 갈 수 있도록 부뚜막에 말리곤 했다.

-- 혹시 결벽증 아닌가.

▲ 나는 모든 것이 정리 정돈이 잘 돼 있어야 하는 성격이다. 최근에 백내장 수술을 했더니 이전에 잘 안 보이던 것이 지금은 잘 보인다. 그래서 청소를 더 심하게 하고 있다. 청소하면 즐겁고 상쾌하다. 청소를 마치고 그곳에서 책을 보면 집중이 잘 된다.

-- 술·담배는 하나.

▲ 담배는 안 피운다. 술은 가끔 마신다. 내가 20년 전에 영국인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술이 소주라고 한다. 남편과 밖에서 식사할 때 술을 한 잔씩 마신다. 나는 20대부터 술을 배웠다. 평화시장에서 일이 끝나고 나면 친구들과 을지로 튀김집에 몰려가서 환타를 시키고는 술을 타서 마셨다. 술은 몰래 가방에 넣어서 가져갔다.

-- 독서를 좋아했나.

▲ 책을 안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이 있었다. 어릴 때 박경리, 박완서 같은 분이 쓴 책을 읽었다. 10대 시절에는 친구들 5명이 책을 한 권씩 사서 돌려가며 5권을 읽기도 했다. 큰오빠(전태일)가 집에 사다 놓은 데일 카네기, 톨스토이, 흥선대원군의 전집도 읽었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 건강검진을 했더니 백내장 말고는 몸에 문제가 없다. 어릴 때 등산하다 허리를 다쳐서 20대에 요가를 시작했다. 영국에서 12년간 공부하면서 요가 때문에 건강관리를 잘 할 수 있었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질문하는 전순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 본인이 원하는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 나는 독일식, 핀란드식 사회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런 나라에도 양극화는 있다. 가난한 사람이 있고 노숙자도 있다. 그렇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자기 분야에 노력했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우받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 국회의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평소에 지역에 신경을 전혀 안 쓰던 국회의원들이 예산을 얼마 따냈다고 플래카드를 걸어놓는다.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영국의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국민들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수록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했다.

-- 비례대표 공천에는 문제없나.

▲ 어떤 당에 들어가려면 그 당의 정강정책에 동의해야 한다. 당도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런 것 없이 신선해 보인다는 이유로 마구 영입한다. 전문성 있는 비례대표 의원은 계속 둬야 하는데 4년마다 기계적으로 물갈이하는 것도 문제다. 당의 정체성에 맞는 정책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는 인기영합주의만 있다.

생전의 조영래 변호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는 어떤 분인가.

▲ 인간미가 있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큰일을 꿈꾸면서도 작은 일에 공감하는 분이었다. 도피 중의 조 변호사는 나와 조조영화를 보면서 만나곤 했다. 그는 신문을 꼭 읽으라고 하면서 옥편도 사주셨다. 1989년 영국에 와서 그분이 생각나서 어머니께 그분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 영국인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 영국 러스킨칼리지에서 수업 시간에 만났다. 당시에는 생각이 맞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고 열심히 일만 하면 된다고 했던 사람이다.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그가 장문의 메일을 통해 프러포즈를 해왔다. 남편은 나한테 정치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중요한 조력자다.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남편은 현재 영국에 있다. 한국과 영국을 오간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지난 16년간 '수다공방'을 통해 사람들을 최고의 기술자로 만드는 교육을 했다. 지난 8월에는 수다공방을 한국가치패션연구소로 바꿨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더는 쓰레기를 만들지 말고 재생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행복한 게 제일 좋다. 10년이라는 너무 먼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1년 중에서도 한 달, 한 달 중에서도 1주일 계획을 잘 세우고 실행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게 좋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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