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야근 싫어요”… 도마 오른 포괄임금제 이번엔 달라지나 [이슈+]

구현모 2023. 1. 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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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수당 정해놓은 포괄임금제에 대한 직장인 불만 커
“일해도 칭찬 받거나 돈 더 주는 거 아냐… 의욕 떨어져”
정부, 포괄임금제 남용 조사 나서… 현실 바뀔진 의문
의류 브랜드에서 근무하는 4년 차 디자이너 이모(29)씨는 매달 급여명세서를 보면서 한숨을 쉰다. 입사 이후 제때 퇴근한 적은 손에 꼽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받는 월급은 똑같기 때문이다. 이씨의 월급에는 식대 10만원과 야근수당 24만원이 포함돼 있다. 월 15시간 이상 근무할 때만 수당을 받을 수 있는데, 실제로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대부분은 대가 없는 노동을 하는 셈이다. 이씨는 “회사에서는 야근은 안 해도 된다면서 퇴근 직전 수정 요청을 하거나 잔업을 던져준다”며 “야근을 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일을 못 해서 하는 것이라고 핀잔을 줄 때도 있는데, 나는 대체 무엇으로 보상을 받나”라고 토로했다. 

연장근로수당 등을 기본급에 포함하는 계약, 이른바 공짜 야근의 주범으로 불리는 ‘포괄임금제’를 손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전문가 자문그룹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미래연)도 정부의 노동개혁 과제 중 하나로 포괄임금제 오남용 방지를 꼽았고, 최근 법원에서 포괄임금제를 무효라고 판단한 사례가 나오는 등 개편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포괄임금제는 특히 중소기업이나 정보기술(IT) 업종 등에 만연해 있는데, 사실 이는 근로기준법상 제도가 아니라 법원 ‘판례’에 의해 형성된 임금지급 관행이다. 기본적으로 사용자는 노동자가 실제로 일한 시간만큼 법정수당을 산정해서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2010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거나, 근로시간 규제를 위반하지 않을 것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것 △근로자에게 불이익하지 않을 것 등의 엄격한 요건을 만족할 경우 임금을 포괄적으로 산정해서 지급할 수 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나 경비직과 같이 업무 특성상 근로시간이 일정치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근로시간이 비교적 명확한 사무직들도 포괄임금제를 적용받으면서 장시간 무료노동에 시달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2020년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10인 이상 사업체 2522개 중 749개(29.7%)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직장인 10명 중 3명은 포괄임금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연차수당이나 퇴직금까지 포괄임금에 포함하는 악덕 사업주도 있다. 

이에 정부는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포괄임금제 오남용 사업장에 대한 첫 기획감독을 실시한다. 전국 지방청 광역근로감독과를 중심으로 연장근로 시간제한 위반,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등 근로시간 관련 법 위반 여부를 집중 감독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출퇴근 기록 등도 살필 방침이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좌장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가운데)가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권고문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고용부가 근로감독에 나선 이유는 노동개혁에 관한 자문그룹인 미래연이 최근 포괄임금 오남용을 막기 위해 근로감독을 강화하라고 정부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미래연은 지난 12일 발표한 권고문에서 “실근로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포괄임금 약정이 오남용돼 장시간 근로, 공짜 노동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포괄임금제에 제동을 건 법원 판례가 나오기도 했다. 2020년 의성군과 군위군의 일부 버스 기사들이 사용자 측과 불합리한 포괄임금 약정을 맺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원(주심 이슬기 판사)은 “의성 여객과 군위교통이 각각 노동조합과 체결한 포괄임금협정은 무효”라며 “사측은 운전기사들에게 미지급한 연장근로수당과 주휴수당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이 처음으로 포괄임금제를 무효라고 판단한 것으로 다른 업종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여전히 현실적으로 포괄임금제 폐지까지는 어렵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일부 특수업종을 제외하고는 포괄임금제를 없애야 한다는 직장인의 의견이 많다. 특히 야근이 잦은 IT 업종이나 광고대행사 등에 재직 중인 적지 않은 직장인들이 실제 노동시간에 비하면 미리 산정되어 있는 수당이 터무니없이 작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노동의 댓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다보니 필요한 일이 있어도 야근을 피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의견도 있다. 

광고홍보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강모(27)씨는 “연봉계약서에 내가 얼마나 일할지 모르는 야근수당이 포함된 것을 보니 의욕이 떨어졌다”며 “보상이 없는데 누가 야근을 하고 싶어하나”고 말했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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