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道를 따르는 사람들]② ‘우승보다 수성이 어려웠죠’ 국내 첫 소믈리에 대회 4연패… ‘왕중왕’ 거머쥔 안중민 SPC 소믈리에
2016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대회 우승
2017, 2018, 2020, 2022년 소믈리에 왕중왕전 4연속 우승
흔히 짧은 기간에 연달아 우승한 스포츠 팀을 일컬어 ‘왕조(王朝·dynasty)’라 부른다. 첫 우승은 나아가고 성장하는 과정이지만, 연패(連霸)를 하려면 손에 쥔 것들을 지키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에 우승했을 때는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만, 4연패를 하고 같은 말을 했더니 주변 사람들도 ‘겸손이 지나치다’면서 손가락질 하더라구요.
안중민 SPC그룹 총괄 소믈리에는 현재 국내 소믈리에 업계에서 최강자로 꼽힌다. 본인 왕조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2015년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2016년 한국 국제 소믈리에 협회가 주최한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후 2017년, 2018년, 2020년, 2022년까지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대회 수상자 가운데 우승자를 가리는 왕중왕전에서 내리 우승했다. 2019년과 2021년에는 왕중왕전이 열리지 않았다. 이 대회 4연패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소믈리에는 대회에서 전 세계 수십만종 와인 가운데 어떤 와인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소믈리에가 연달아 우승할 확률이 매우 낮다.
드넓은 와인의 세계에서 소믈리에마다 본인이 강점을 가진 와인 품종이나 서비스 분야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첫 우승보다 그 이후에 수성이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안 소믈리에는 파리크라상 소속으로 SPC그룹 소속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를 총괄한다. 오전에는 와인을 고르다 오후에는 VIP 의전을 맡는다.
그는 지난해 왕중왕전을 준비하면서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무작위로 술을 다섯 종류씩 맛봤다. 위스키, 보드카, 진, 소주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입에 넣어 감각을 깨운 다음에야 회사로 출근했다. 이후에는 동료 소믈리에 도움을 받아 와인 수십종을 매일같이 구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안중민 소믈리에는 “와인은 기본이고 위스키, 코냑 같은 증류주와 맥주, 치즈 공부까지 소홀히 하지 않은 게 우승 비결”이라며 “한번도 쉬운 대회는 없었지만, 이번 대회가 유난히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요리사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당시 인기였던 드라마 ‘호텔리어’에서 엿본 호텔 주방이 멋졌다는 이유였다.
그는 프랑스 호텔 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인이 돼 보르도 와인을 맛보면서 방향을 바꿨다. 프랑스 제 2도시 리옹에 있는 미쉐린 투스타 레스토랑에서 견습 소믈리에로 일하면서 프랑스어로 와인을 익혔다.
“한번은 프랑스 국회의원이 와서 700만원짜리 와인 한 병을 시키고 절반을 남겼더라고요. 오후 3~5시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고 손님들이 남긴 와인 맛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책으로만 보던 와인을 경험할 기회가 많았어요.”
매년 수천종이 넘는 와인을 맛보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와인을 잘 고를 수 있는지 물어봤다. 포도 품종, 생산지, 수확한 해(빈티지) 순으로 단계를 밟으라고 했다.
우선 본인 입맛에 잘 맞는 포도 품종을 찾고, 칠레·미국·스페인 등 지역 별로 다른 맛을 즐겨보고, 그 이후 빈티지(수확 연도)를 따지라는 것이다.
본인 입맛을 깨우는 첫 단추를 꿰기 위해서는 처음 들어보는 품종이나, 도무지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음식과도 와인을 곁들여보는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그에게도 도전 의식을 일깨우는 와인이 있을까. 수만 종류 와인을 마셨을 법한 안 소믈리에에게 최근 마신 와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와인을 뽑아 달라 묻자 그는 심사숙고 후에 어렵게 두 병을 꼽았다.
첫번째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 도멘 샤를로팽 티시에의 마르사네 블랑이다. 이 와이너리 오너이자 와인 생산자 얀 샤를로팽은 전설적인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 필립 샤를로팽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만든 레드 와인은 놀라운 깊이감과 섬세한 표현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와인은 아들이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도멘 샤를로팽 티시에서 나온 레드 와인에서는 아버지와 비슷한 굵은 선이 느껴지는데, 화이트 와인에서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유명 생산자의 아들이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보통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만, 얀 샤를로팽은 벌써 자기 색깔을 확실히 가지기 시작했어요.
여느 유명한 부르고뉴 도멘과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와인 정보를 가린 채 하는 시음)을 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 가격은 그보다 삼분의 일, 사분의 일 정도니 보이는 대로 사두는 게 이득이죠.”
두 번째로 고른 도멘 쇼피트의 샤슬라 비에이유 비뉴는 ‘어지간한 소믈리에도 잘 모르는 나만의 비법 같은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이 와인은 우리나라에서 딱히 선호도가 높지 않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 와인이다.
이 와인을 만드는 샤슬라라는 포도 역시 와인을 만드는 품종인 동시에 식용으로도 쓰이는 포도라 업신여김을 당하기 일쑤다. 캠벨이나 거봉 같은 식용 포도는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샤르도네 같은 와인 양조용 포도에 비하면 당도가 낮고 껍질이 얇아 좋은 품질의 와인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안 소믈리에는 “오히려 그런 식용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와인이 중립적인 성향을 띈다”며 “고수가 듬뿍 들어간 음식, 똠얌꿍처럼 향이 강한 음식과 이 와인을 마시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고 말했다.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도수 높은 레드와인을 마실 때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낮은 온도에서 마셔보라는 조언도 곁들였다.
그는 “입안에서 떨떠름한 느낌이 많이 드는 도수 높은 레드와인은 평소처럼 16에서 18도 사이 온도로 마시면 한잔까지는 편히 마실 수 있지만, 이후에는 입이 피로해진다”면서 “넓적한 그릇에 찬물을 받아서 얼음을 서너 개 정도 띄운 다음 14도 정도로 마시면 혀 끝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에 끝까지 해당 와인이 변하는 모습을 즐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안 소믈리에는 “소믈리에가 전문가로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런 부분”이라며 “누구나 와인을 즐길 수 있지만, 어떻게 하면 가장 맛있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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