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환 위태로운 회사채·CP 140兆 시한폭탄…‘골든타임’ 상반기 자금길 뚫어야

세종=박소정 기자 2023. 1. 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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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 韓경제 생존법 찾기]
③ 돈맥경화를 뚫어라
대기업 우량 신용등급도 5%로 돈 조달 신세
말라 붙은 자금시장, 새해 최대 경제 리스크로
상반기 차환 리스크 터질까…시장 ‘전전긍긍’
회사채시장 양극화·제2블랙홀 등장 등 우려도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 /연합뉴스
“지금 돈이 숨었습니다. 기업이 투자를 안 해서가 아니라 기업도 투자할 돈이 없습니다.”
최태원 SK그룹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금줄이 말랐다. SK텔레콤은 지난해 11월 회사채 3000억원을 4.7%대로 발행했다. 국내 대기업 중 신용등급이 가장 높은 AAA등급인 SK텔레콤도 5%에 육박한 이자를 약속해야 자금을 구할 수 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연 3.25%)보다 150bp(1bp=0.01%p) 높은 리스크 값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그룹 지주회사인 ㈜SK(AA+등급)는 회사채 2900억원을 5.4%대에서 발행했다. 신용등급이 이보다 낮은 SK매직, SK해운, SK에코플랜트 등의 계열사는 7~9%대 고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재계 2위 SK그룹도 고금리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다.

실제로 우량 대기업들의 신용등급인 AA등급 회사채 금리마저 연 5%를 훌쩍 넘겼다. 1년 전만 해도 연 2%대에 불과하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금리를 주고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채권시장에서 최우량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국고채 금리와의 스프레드는 1년 새 60bp에서 150bp까지 2배 넘게 벌어졌다. 그만큼 회사채에 대한 리스크 값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빌리기 어려워진 돈은 벌어지지도 않는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우리나라 기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4.8%. 1000원 팔아 48원 남긴다는 소리다. 1년 전만 해도 75원 남겼지만 지금은 거의 반토막이 났다. 버는 돈은 반으로 줄었는데, 이자 부담은 두배로 는 셈이다. 수익성이 악화한 기업들은 신용등급을 강등 당하고, 다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전보다 더 높은 금리를 지불해 회사채를 발행한다. A급 회사채 금리는 연 6%를 넘어간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BBB등급에 속한 기업들은 연 8~9%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그나마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면 “축하받을 일”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SK하이닉스 M16 전경. /SK하이닉스 제공

돈줄 마른 자금시장과 이로 인한 기업들의 유동성 확보 문제 해결이 새해 최대 경제 과제로 부상했다. 지난해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자금시장 발작 사태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기업들은, 연중 투자 수요가 가장 풍부하다는 1월을 노려 새해부터 자금 확보 전쟁에 참전할 채비 중이다. 고금리·고물가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올해 수출 4.5% 역성장과 취업자 수 10만명 증가에 불과한 고용 상황 등 각종 경제 전망 지표들이 점차 경영하기 어려운 환경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올 상반기가 자금시장 경색 문제를 해결할 ‘골든 타임’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부 역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우량채로의 쏠림 현상 방지를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 안정 문제를 새해 경제정책방향 맨 앞단에서 비중 있게 다뤘다.

하지만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정책자금이 동원되는 등 정책기관이나 은행에서 또 다시 상당 부분의 채권시장 자금을 빨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동시에, 민간기업 회사채 시장도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간 양극화 현상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들이 고개를 들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서 화물차들이 컨테이너를 나르고 있다. /뉴스1

◇ 새해 경제 리스크 첫 과제는? ‘자금시장 경색 완화’

4일 조선비즈가 국내 경제전문가 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정책 당국이 경제 리스크 관리를 위해 집중해야 할 첫번째 과제로 ‘회사채 등 원화 자금시장 경색 완화’가 가장 많이 꼽혔다. 응답자 대다수인 80%가 해당 항목을 선택한 것이다.

정부의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서도 역시나 ‘금융시장 안정’ 방안이 가장 앞단에 위치했다. 정부의 전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국공채 등 우량자산으로의 쏠림 현상을 발행 축소로써 분산시키고, 메마른 회사채 시장은 투자 매력도를 높여 길을 터주자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 혜택, BBB+ 이하 저신용 등급 채권을 다수 편입한 ‘하이일드 펀드’ 투자 세제 혜택 부여 등으로 개인의 회사채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채권시장 쏠림 현상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된 한전채(정부 보증 공사채)의 경우 발행 규모를 올해 대비 3분의1 규모로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 대신 전기 요금의 점진적 인상과 재정 건전화 자구 노력 등을 통해 누적 적자로 인한 한국전력의 자금 부족 문제를 완화하겠다는 계획 정도를 밝힌 상태다. 2026년까지 4년간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로드맵이 함께 제시됐다. 동시에 회사채·기업어음(CP) 시장은 이미 발표해 시행 중인 채권시장안정펀드, 증권사 보증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증권(PF ABCP) 매입 등 조치를 이어 나가며 안정화하기로 했다.

일각에선 이런 조치가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버는 전략이라고 평가한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결국 부실 건설사와 익스포저가 많은 증권사 등을 정리하는 등 구조조정이 돼야 하는 문제인데, 지금은 당장 구조조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동성을 공급해둔 상태”라며 “문제를 한번에 다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서 향후 충격이 덜한 상태로 구조조정을 유도해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올 상반기는 유동성 위기가 다시 불거질 위험성이 큰 때이자 동시에 자금시장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적기, ‘골든타임’인 셈이다.

그래픽=손민균

◇ 1분기 차환리스크 회사채·CP 만기 대거 몰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신용 경계감은 극도로 치솟아 있는 상태다. 채권·단기자금 시장의 자금 중개 기능이 크게 제약된 모습이다. 신용시장의 경고등으로 여겨지는 회사채와 국고채 금리의 스프레드는 지난해 롤러코스터를 탔다. 회사채 AA- 등급 3년물과 국고 3년 금리의 스프레드는 지난해 초 60.50bp였다가 지난해 12월 1일 177.2bp까지 확대됐는데, 이는 13년 만의 최대폭이었다. 단 지난 2일엔 148bp로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다.

회사채 금리 자체도 1년 새 크게 치솟았다.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3년물 AA- 등급 회사채 금리는 지난해 초 연 2.474%에서 시작해 같은해 10월 연 5.73%까지 고공행진했다. 지난 2일엔 연 5.262%를 기록했는데,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하면 안정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당장 올해 초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와 CP를 무사히 상환하거나 차환할 수 있을지부터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오는 1~3월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전체 규모는 21조272억원이다. 자산유동화증권(ABS) 등을 제외한 일반 회사채 규모는 14조6827억원인데, 이 중 발행이 어려운 비우량 A급 이하 등급(AAA~AA- 제외)의 규모는 4조5426억원에 달했다. 3분의1 수준이다.

같은 기간 만기 도래 CP 규모는 총 136조5572억원이다. CP는 일반 회사채보다 만기가 짧아 빨리 상환해야 하고 금리도 높은 편이라 기업의 선호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발행 절차가 간소해 신용도가 낮고 돈이 급한 회사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중에서도 더욱 취약한 증권사 CP 및 PF ABCP의 3월까지의 만기 도래 규모는 지난해 11월 말 기준 총 59조8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한은은 집계했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CP 시장의 위기를 지난해 말 어느 정도 막았다고 하더라도 길어야 만기가 3개월로 짧기 때문에 금방 롤오버(roll-over·만기 연장) 할 수밖에 없다”며 “연초가 되면 또 생각해야 하는 게 신용등급인데, 여러모로 경영 여건이 좋지 않았으니 등급이 하향 조정된 기업들이 생겨날 것. 이렇게 되면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편집부

◇ 비우량 회사채 속수무책…은행·공사채 발행 리스크 우려도

새해부터 예고된 우량 회사채 물량의 대거 출현이 채권시장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집중된다. 경기 침체 공포가 커지면서 대기업들마저 줄줄이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거나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가운데, 현금 확보를 위한 회사채 발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신용등급 AAA의 KT가 이날 기관 수요예측을 거쳐 1500억원의 회사채 발행을 준비 중이며, 포스코·LG화학 등도 각각 오는 5·17일 수요예측을 거쳐 3500억원·40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수요 예측 결과에 따라 이들이 발행량을 두배까지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업계에선 대기업의 자금 확보전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돼 올해 2월도 채 되지 않아 신규 발행량이 1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올해 회사채 발행액(24조8000억원)의 절반 가까이다. 대기업 중심의 AA 이상 우량 회사채에 다시금 자금이 쏠리면 중소·중견기업의 자금 조달 길은 더욱 씨가 마르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그래픽=편집부

정부의 각종 시장 안정 정책들이 역으로 또 다른 쏠림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한전은 올해 한전채 발행을 3분의1 규모로 최소화하고 향후 4년간 점진적으로 전기요금을 인상해 적자를 해소하기로 했다. 물가 안정을 위해 급격한 요금 인상은 지양하겠다는 메시지도 함께 담겼다. 이렇게 되면 한전이 쓸 수 있는 주요 자금 조달 창구는 거의 은행뿐인데, 만약 한전의 대규모 대출을 위해 은행이 AAA 등급의 은행채 발행을 무리하게 늘리면 자칫 ‘블랙홀’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

540조원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정책금융 자금 공급 계획도 양면성을 띠긴 마찬가지다. 안심전환대출 확대와 그 재원 마련을 위한 주택금융공사의 주택저당증권(MBS) 대규모 발행, 공급망안정화기금 조성을 위한 정부보증채 발행, 가스공사채 발행 확대 등이 그 예다. 상당 부분 정책기관에서 채권시장 자금을 빨아들여 전반적인 금리를 밀어 올리는 등 시장을 교란할 위험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정부 대책들이 당연히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것이지만, 사실 근본적 문제인 고름을 도려내는 것(구조조정)이 아닌 상처를 덧대는 방식인 만큼 한계가 있다”며 “올해는 레고랜드 사태처럼 자금시장에서 무언가 일이 터질 만한 나쁜 여건들이 더 도처에 널려 있는 환경인 것이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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