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혁신 없이 가격만 올리는 식품사, 외면 멀지 않았다

배동주 기자 2023. 1.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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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이른바 식품 가격 인상의 해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원부자재 가격 상승으로 식품 제조사들의 제품가 상향 조정 공지가 1년 내내 계속됐다.

여기에 물류비·에너지 가격 인상 등이 맞물리며 몇 년에 한번 올랐던 가격은 수차례 오르기를 반복했다.

실제 식품 제조에 들어가는 원부자재 가격은 큰 폭으로 올랐다. 식품 생산에 두루 쓰이는 밀가루만 해도 소맥분 기준 지난 5월 한때 시카고상품거래소 선물가격 기준 톤(t)당 470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1년 전 t당 240달러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해 2배 가까운 수준이다.

지난해 6월 이후 곡물 가격은 하향세로 접어들었지만, 이후에는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400원대로 올라서는 등 고환율이 곡물 가격 인하를 상쇄했다. 식품 제조사들은 “연료비(LNG)와 포장재 가격까지 올랐다”며 좀처럼 인상이 없었던 즉석밥과 라면 가격도 연이어 올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식품 제조사들이 가격 인상 이외에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해명과 달리 CJ제일제당의 영업이익률(연결 기준)은 2019년 4.01%에서 2021년 5.8%으로 늘었고, 작년에는 5.9%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치캔 제품 가격을 2021년 12월 이후 지난해 12월 1년여 만에 다시 올린 동원F&B 매출원가율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77%대를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다.

매일유업의 경우도 지난해에만 1월과 10월 각각 컵커피 가격을 인상, 매출원가율을 70%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들은 가격은 올리면서 비용 지출에는 인색했다. 지난해(3분기말 기준) 국내 주요 식품 제조사 중에서 연구개발(R&D)비를 가장 많이 쓴 곳은 CJ제일제당이었지만, 이마저도 1571억원에 그쳤다. 같은 기간 CJ제일제당의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였다.

이외 농심, 동원F&B, 대상 등 국내 주요 식품 제조사들은 R&D에 전체 매출의 1%도 투자하지 않았다. 농심은 대표 제품인 신라면 가격을 2020년 올리고 지난해 재차 인상하면서도 R&D에는 더 적은 돈을 썼다. 지난해 매출액 대비 R&D 비율은 전년 1%에서 0.9%로 줄었다.

국내 식품기업은 글로벌 식품 제조사에 비해 매출 등 체급도 작지만, 더 큰 문제가 “부족한 R&D 투자 때문”이라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투자를 아끼다 보니 원재료비 인상이라는 외부요인을 흡수하지 못하고 손쉬운 가격 인상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글로벌 식품 기업인 네슬레는 R&D에 매년 2조원이 넘는 돈을 쏟고 있다. 이는 2019년 국내 10위 식품 제조사 전체의 R&D 비용의 7배가 넘는 돈이다.

국내 식품 산업에 혁신은 자취를 감췄다. 식품 제조사의 매출을 견인하는 대표 품목이 대부분 수십년 된 장수 제품이 전부라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CJ제일제당의 햇반만 해도 올해 27살이 됐다. 농심의 신라면은 1986년 출시됐지만, 37년째 대표 제품이다.

혁신이 빠진 채 계속되는 가격 인상은 당장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팔아야 살 수 있는 유통채널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CJ제일제당의 햇반 등 주요 상품 발주를 중단했는데, 여기에는 CJ제일제당의 잇따른 판매 가격 인상 요구가 직접 영향을 미쳤다.

쿠팡은 햇반의 시장 지배력이 크지만, 자사 자체브랜드(PB) 즉석밥이 있고 햇반을 대체할 상품도 많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시장 지배력은 크지만, 이를 대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쿠팡 외에도 롯데마트 등에서의 가격 반발 발주 중단이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소비자의 외면도 멀지 않았다. 식품 제조사가 베스트·스테디셀러 상품에만 의존하며, 가격 인상으로 손쉬운 ‘경영 면피’에 나서면 소비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되레 많아진다. 당장 쿠팡의 즉석밥 랭킹 10위에 PB인 ‘곰곰’ 즉석밥이 3개 제품이나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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