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외계어’가 된 한국 아파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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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전남 나주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1차’와 2차로 25자다. 동탄의 ‘동탄시범타운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처럼 20자 넘는 곳은 여럿이다. 2019년 전국 아파트 단지명의 글자 수를 조사했더니 평균 9.84자였다. 1990년대엔 4.2자였다. 아파트 브랜드 ‘고급화’와 맞물려 길어지는 추세라 한다.
▶이름이 길면서 어렵기도 하다. 이탈리아어 루체(luce·빛)와 독일어 하임(heim·집)을 합친 ‘루체하임’, 영어 그레이스(grace·우아함)와 라틴어 움(um·공간)을 결합한 ‘그라시움’, 불어 오트(haute·고급)에 테르(terre·땅)를 합친 ‘오티에르’ 등 온갖 외국어가 동원된다. 아파트 이름을 이렇게 짓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나 싶다. 오죽하면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일부러 어렵게 지었다’는 우스개가 생겼겠나. ‘시어머니 못 오게 했더니 시누이 앞세워 오더라’ 같은 속편도 돈다.
▶한국식 아파트 작명법엔 ‘세련된 이름 짓자’는 취지 이상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한마디로 ‘돈’이다. 한강변에 짓는 아파트엔 ‘리버’를 꼭 넣는다. 단순히 강 옆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값이 오른다”며 주민이 요구해서다. 공원 근처이면 파크뷰, 숲이 있으면 포레, 학군이 좋거나 학원이 많으면 에듀, 주변에 4차로 이상 대로가 있으면 센트럴, 고가 인테리어를 썼으면 더퍼스트·베스트·노블 등으로 표현한다.
▶서울시가 난해하고 외국어 위주인 아파트 이름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짓도록 아파트 작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재건축·재개발을 추진 중인 시내 아파트 600여 곳에 권고할 방침이라고 한다. 취지는 좋지만 돈 앞에서 이런 지침이 먹힐까 싶다. 1970년대 아파트 이름을 힐탑·타워·렉스 등 영어로 짓는 게 유행하자 정부가 “우리말로 지으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장미·미주·은하·수정·개나리 등이 그때 생겨났다. 당시에도 아파트명을 강제할 법규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정부 시절이라 가능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팔 때 한국산임을 숨겼다. 그래야 유리했다. 그런데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며 일부 제품은 포장지에 한글을 넣어 한국산임을 알려야 오히려 잘 팔린다고 한다. 한국의 아파트 건축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파트가 돈 버는 투기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공간이란 인식이 확산되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 아파트 이름이 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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