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르면 詩 안 써질까봐, 하루 한끼만 먹기도 해요”

이영관 기자 2023. 1. 4.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키스할 때…’ 펴낸 고명재
일상의 순간 포착한 시 43편 실어
출간 당일 초판 1500부 모두 팔려
고명재는 “사랑은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흔한 기적”이라고 했다. /문학동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 풀 한 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 고명재(36)의 첫 시집은 어린 시절 들은 비구니의 말로 시작한다. 생업에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시인을 보살펴줬던 그는 4년 전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떠날 때도 시신을 해부용으로 기증하셨어요. 육체의 보존이 아니라, 순간의 사랑을 선명하게 보여주셨죠.” 누군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시를 썼다. 비구니, 할머니, 엄마…. “떠난 사람들이 제게 준 금싸라기를 떠올렸어요. 그중에서 가장 찬란했던 사랑을 보여주고, 함께 말하고 싶었습니다.”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은 일상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한 시 43편을 담았다. 키워드는 사랑과 죽음. 시인은 3년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대구 계명대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시집은 출간 당일 초판 1500 부가 모두 팔렸고, 곧이어 2000부 중쇄에 들어갔다. 신인 작가의 첫 책으로는 이례적이다.

일상적 순간에서 죽음과 이별을 떠올리는 ‘밝은’ 애도(哀悼)의 시편이 많다. 음식과 관련된 표현도 돋보인다. 예컨대 소보로빵이나 수육을 먹다가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을 떠올리는 식이다. 평생 음식점을 했고, 지금은 반찬 가게를 하는 부모님 영향이다. “부모님 대신 재료 심부름을 자주 합니다. 가공되기 전의 채소를 보면서 ‘저런 걸 우리가 먹는구나, 살아있던 존재를 먹는구나’라는 걸 생각합니다.” 그는 음식에 일종의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배가 부르면 시가 안 될까 봐 하루에 한 끼만 먹기도 합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요.”

‘가장 투명한 부위로 시가 되는 것/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미래가 빛나서/ 눈 밟는 소리에 개들은 심장이 커지고/ 그건 낯선 이가 오고 있는 간격이니까’(표제작 중에서) 시인이 말하는 ‘키스’는 연인 사이의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존재가 부딪히는 순간에 가깝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내 눈앞의 대상이 환해서 그 존재에게 충실하게 다가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존재가 뒤섞이는 모습을 통해 국적·인종 등 사람을 구분하는 것들에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더 많은 사람과 시를 함께 읽고 싶지만, “시는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했다. “타인의 마음을 손쉽게 읽어낸다는 건 거짓일 가능성이 높아요. 일종의 함정이죠. 요즘은 시험문제 풀듯 타인을 생각하는데, 시를 사람들과 많이 읽으면 우리 사회가 나아지지 않을까요. 왜 이해될 수 없는 말을 하는지 헤아리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목표는 시 한 편에 진심을 다하는 것. “스님은 미역국에 밥 하나 말아줘도 온 마음을 다해서 말아줬습니다. 그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어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