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학한 정부가 외국 용병까지 고용해 멸망을 자초하는구나” [박종인의 땅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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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 도망가려던 군주
을미사변 넉 달 뒤인 1896년 2월 11일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타국 영역으로 달아나려던 시도는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갑신정변 한 달 전인 1884년 11월 2일 고종은 “공식 의뢰가 있으면 공사관은 물론 일본으로 피하도록 돕겠다”는 일본변리공사 다케조에 제의에 “명심해서 잊지 않겠다”고 화답한 적도 있었다.(1884년 11월 9일 ‘다케조에 공사 내신’, 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김종학 역, 일조각, 2013, p819, 재인용. 김옥균, ‘갑신일록’)
고종은 ‘잊지 않았다.’ 이후 청일전쟁(1894)과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같은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 고종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공사관 문을 두드렸다. 모두 8회에 걸친 공사관 도피, 팔관파천(八館播遷) 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파천이 아관파천이다. 한 나라가 그 나라 원수의 안녕을 보장하지 못할 지경으로 지속적으로 군사와 안보가 엉망진창이었고 정치가 난장판이었다는 뜻이다. 가만히 있는 나라가 혼자서 추락할 리 만무하다. 안보를 맡아야 할 지방군사를 궁궐 친위대로 만든 사람이 고종이었고 여흥 민씨 척족과 함께 나라와 백성 곳간을 거덜낸 주체도 고종이었다. 허약한 군사력과 치안력은 그 고종으로 하여금 변고가 있을 때마다 외국, 외국인을 찾게 만들었다. 오늘은 그가 시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매몰차고 거친 저항을 받고 없던 일이 돼버린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외국 용병 고용 미수 사건’ 이야기다.
‘밀덕’ 고종, “쏜 적 없으니 압수는 좀...”
‘밀덕’은 ‘밀리터리 덕후’를 줄인 말이다. 군사 혹은 무기 애호가를 뜻하는 신조어다. 고종은 밀덕이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을 때 일본은 개틀링 기관포 1문과 탄약 2000발을 선물했다. 개틀링은 분당 400발을 발사하는 속사 기관총이다. ‘탄알 수를 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한다’는 전권대신 신헌의 보고에(1876년 2월 6일 ‘승정원일기’) 고종은 이후 세월을 두고 개틀링포를 수입했다. 188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 선교사 길모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국왕은 개틀링포를 몇 문 구입하고 이 포를 수시로 훈련에 투입했다. 개틀링포 사격 소리를 왕이 즐겼기 때문이다.’(G. 길모어, ‘Korea From Its Capital’,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92, p235) 외국인 눈에 고종이 군사력에 매달린 이유는 국방이 아니었다. ‘즐겼다’는 단어에 많은 역사적 의미가 숨어 있다.
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인 시위대 500명이 격전을 벌였다. 독일제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조선 제일인 평양군으로 구성돼 있었다. 싸우겠다는 사기도 충만했다.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오전 5시 30분쯤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1894년 음6월 21일 ‘고종실록’) 투항하라는 것이다. 그 어명에 시위대는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황현, ‘매천야록’2 1894년③ 14.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국사편찬위) 일본군은 개틀링포 8문과 크루프 기관포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고종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그 무기들은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p64~65, 재인용) 이듬해 서울을 방문했던 러시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목조 헛간에는 개틀링 기관총 10문과 7.5cm 구경 크루프 포 6문이 망가진 채 뒹굴고 있었다. 남의 나라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산하게 망가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카르네프 외 4인, ‘내가 본 조선, 조선인’(1896), 가야넷, 2003, p106) 수집한 무기와 위기에 빠진 나라 사이에서 그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아관파천과 러시아 궁궐수비대 200명
1895년 10월 8일 왕비 민씨가 일본인이 주도한 암살단에게 살해됐다. 넉 달 뒤 1896년 2월 11일 남편 고종은 경복궁에서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무기고에는 대량살상무기 개틀링포가 쌓여 있는데 이를 사용할 군사가 전무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월 9일 고종은 중추원 1등의관(一等議官)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1896년 3월 11일 ‘고종실록’) 4월 1일 제물포에서 러시아 군함 그레먀치 호에 오른 일행은 여섯 달이 지난 10월 21일 궁궐에 복귀했다.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겠다는 큰 그림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고종이 내린 미션은 고종다웠다.
6월 5일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외부대신 로바노프를 만났다. 황제 알현을 신청한 뒤 민영환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5개조 밀지를 공개했다. 첫 두 개 조가 이러했다. ‘국왕 보호를 위한 경비병 제공’ ‘군사교관 제공’. 각종 고문관과 전문가 및 대일부채 청산용 차관 300만엔 제공도 있었다. 이미 5개조 요구사항은 다른 경로를 통해 로바노프에게 전달된 상태였지만, 로바노프는 마치 처음 들은 듯이 “서면으로 제출해달라”고 답했다. 민영환이 재촉했다. “우리 왕후가 친러파라 죽음을 맞았다. 러시아는 조선이 도움을 바라는 유일한 나라다.”
다음날 민영환은 황제를 알현하고 ‘외부대신에게 읽은 메모를 그대로 두 번 반복했다’.(‘윤치호일기’)
6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로바노프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궁궐 주둔 병력 200명’이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덧붙였다. 로바노프는 “다른 나라와 마찰이 생긴다”고 거부했다. 화답을 받지 못한 민영환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사흘 뒤인 6월 16일 러시아 외부(外部)를 방문한 민영환은 주무관인 백작 카파니스트에게 “다섯 가지 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비병”이라고 강조했다. 카파니스트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대답했다. 민영환이 재차 물었다. “그러면 유사시 러시아공사관 경비병이 궁궐 진입을 할 수 있는가?” “약속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군 왕궁 주둔에 반대했다. 왜 러시아가 그걸 해야 하지?”(이상 1896년 6월 5일, 6일, 13일, 16일 ‘윤치호일기’, 민영환, ‘해천추범’(1896))
시종일관, 황제부터 실무 관리까지 조선국 전권대사가 요구한 사항은 “우리 궁궐에 귀국 병사를 주둔시켜달라”였다. 오로지 국왕 개인 신변 보호가 전권대사가 받은 미션이었을 뿐, 1880년대 내내 청나라 군사가 한성에 주둔할 때, 1894년 일본군이 궁궐을 공격했을 때 나라가 겪었던 참담한 경험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요구는 거부됐다. 대신 러시아는 귀국하는 민영환에게 참모본부 육군대좌 푸차타, 군의관 체르빈스키를 포함한 고문단 13명을 딸려보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3.기밀본성왕래1,2 (60) 러시아 육군무관 내한 건, 1896년 10월 31일) 200명 대 13명. 외국에 기대려만 했을 뿐, 고종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조선을 관찰하는 러시아 제국을 전혀 읽지 못했다.
환궁, 제국 선포 그리고 군사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파천을 끝내고 조선 땅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1898년 3월 방한했던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철수했다. 그해 6월 광무제 고종은 본인은 대원수, 황태자 이척은 원수로 육해군을 총괄한다고 선언했다. 1899년 6월에는 황제가 군권을 행사하는 조직 원수부를 창설하고 ‘원수부관제’를 발표해 이를 입법화했다. 실질적으로 궁궐을 경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원수부 청사는 현 덕수궁 대한문 오른쪽 매표소 부근에 있었다.
그렇게 제국 선포 후 군사력 강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느닷없이 고종이 극비리에 외국인 용병부대를 창설해 국왕 경호병으로 삼겠다는 계획이 폭로된 것이다.
용병 고용 미수사건
‘황제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궁궐경호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미국인 고문 그레이트하우스가 상해에서 고용한 무직자들이 도착했다. 워낙 서둘러서 몇몇을 제외하면 엘리트가 없다. 서로 다른 5개국 용병 규율을 잡으려면 강건한 인물이 필요한데, 황제 대리인인 그레이트하우스는 그런 장교급을 찾지 못했다. 경호대는 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프랑스인 5명, 독일인 5명, 러시아인 2명이다. 지휘관이 될 만한 사람은 없다.’(한국근대사자료집성18 ‘프랑스외무부문서’8 129.황제의 외국인 친위대 구성 계획 추진 보고, 1898년 9월 20일)
이미 황제 용병 고용 소문을 취재중이던 ‘독립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법부 고문관 그레이트하우스가 궁내부 장봉환과 함께 상해에서 구미 각국 30인을 고빙해 황실을 보호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정부와 순사와 군사들은 무엇을 하는가. 대한(大韓)은 전국이 모두 사람 없는 지경으로 정부에서 자처하니 이런 수치와 욕이 어디 있으리오.’(1898년 9월 20일 ‘독립신문’)
이승만이 주필로 일하던 ‘제국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 사람을 청하여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로 어디 있으리오. 탐학만 주장삼아 다 잡아먹었으니, 이제 멸망하기를 자초하는구나. 결단코 시행이 못 되도록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다.’(1898년 9월 19일 ‘제국신문’) ‘독립신문’ 영문판은 ‘치외법권을 보유한 외국 용병부대는 대한제국 정부가 관리 불가능하며, 결국 황민이 황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9월 14일 그레이트하우스, 장봉환, 주석면 3명과 함께 상해에서 제물포로 들어온 용병은 모두 30명이었다. 이는 러시아 고문단 철수를 핑계로 황제 환심을 사려는 일부 인사들이 고종에게 허가를 받은 계획이었다. 비밀계획이 상해 현지에서 들통이 나자 고종은 상해에 망명 중이던 민영익을 통해 계획 취소를 통보했다. 하지만 용병은 예정대로 제물포에 도착했고, 각국 공사관과 언론 안테나에 걸린 것이다. 이를 취재하는 ‘독립신문’ 기자에게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외부대신 박제순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위 날짜 ‘독립신문’)
독립협회와 각국 공사관의 거친 항의에 고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장봉환 무리가 짐을 팔아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12, 10.기밀본성왕신 (33)30명의 고용 외국인 순사 배척의 건, 1898년 10월 5일) 프랑스 기록에는 ‘딱 잡아떼는 버릇대로’라고 덧붙어 있다.
결국 열흘을 서울에서 빈둥대던 용병들은 10개월치 봉급 2만1000원과 체류시 봉급 4200원 따위를 합쳐 총 3만원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받고 9월 26일 제물포를 떠났다. 참고로 1898년도 대한제국 세출예산은 452만5530원으로, 용병들이 받아간 돈은 제국 예산의 0.66%였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수시로 외국 공관을 기웃거리고, 대사를 보내 궁궐 주둔병을 요청한 군주였다. 황제가 된 그가 벌인 일이 용병 고용이었고, 이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책임 전가였다. 겉으로는 군을 통솔하는 대원수 시스템을 만들면서 뒤로는 용병을 찾던 군주, 고종이었다. 그 고종을 미국인 최측근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평가했다.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다를 바 없이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축낸 지도자.’(F. 해링턴, ‘God, Mammon, and the Japanese: 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 위스콘신대 출판부, 1944,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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