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내려올 때를 알았던 거인, 베네딕토 16세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1. 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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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8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일반 알현 때에 아이에게 입 맞추는 베네딕토 16세 당시 교황.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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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1년 후 작성한 ‘영적 유언장’엔 “감사할 이유 너무 많아”

“늘그막에 내가 살아온 수십 년을 돌아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지난 202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선종(善終)했습니다. 이날 교황청은 그의 ‘영적 유언장(Spritual Testament)’을 발표했습니다. 이 유언장은 죽음에 임박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교황에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 8월에 작성돼 16년만에 공개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즉위 직후부터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처럼 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교황직을 수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네딕토 16세 선종 후, 그가 2013년 2월 11일 ‘생전(生前) 사임’할 때 발표한 문서와 이번에 공개된 영적 유언장을 곰곰히 읽었습니다. 이 문서들에서는 ‘물러날 때를 안 리더’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생전 사임 발표문엔 사유와 후속 절차까지 철저히 밝혀

먼저 사임 발표문은 간결하지만 분명하고, 솔직했습니다. 그는 한글 200자 원고지 4.5매 분량의 문서를 통해 자신이 왜 생전에 사임하는지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거듭거듭 제 양심을 성찰하면서, 저는 고령으로 더 이상 베드로 직무(교황직)를 수행하기에 맞는 체력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성인의 배를 이끌고 복음을 선포하려면, 몸과 마음의 힘도 필요합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저에게 맡겨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정도로 제 자신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행위의 중대성을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2005년 4월 19일에 추기경님들의 손으로 저에게 맡겨진 베드로 성인의 후계자인 교황의 직무를 사퇴”한다고 밝혔습니다.

2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조문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교황청은 지난달 31일 선종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의 시신을 이날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하고 사흘간의 일반 조문을 시작했다. 첫날 약 6만 5000명이 조문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학자 출신다운 문장입니다. 사임 이유는 건강 때문이며,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사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2013년 2월 28일 오후 8시’에 자리를 떠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이 스케줄에 맞춰 후임 선출 절차까지 부탁했습니다.

사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전임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이나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덜했습니다. 연극배우 출신인 요한 바오로2세는 스킨십이 뛰어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빼어난 공감능력을 보여줬지요. 두 분에 비해 평생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는 ‘딱딱하고 엄숙한 이미지’였습니다.

‘스트라이커 요한 바오로2세, 수비수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가 대중적 인기가 없었던 것은 스스로 철저히 ‘주연’이 빛나도록 한 걸음 물러서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기도 했지요.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은 사실상 2인자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와 일전(一戰)을 벌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결국 1980년대말 사회주의 붕괴를 이끌었지요. 요한 바오로2세가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였다면, 수비는 라칭거 추기경 몫이었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남미의 해방신학을 비롯한 가톨릭 내외부의 온갖 도전을 온몸으로 방어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동성애, 낙태, 여성 사제 허용 등의 문제에 대해 ‘No’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지요.

보수적일 것 예상 넘어 ‘생전 사임’ 핵폭탄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후 2005년 후임 교황으로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됐을 때 일반적으로는 가톨릭이 더욱 보수화될 것이라고 관측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재위 8년만에 ‘핵폭탄’을 터뜨렸습니다. 건강을 이유로 ‘생전 사임’한 것이지요.

2013년 12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손을 맞잡고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동서고금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교황직이 종신(終身)이라는 것은 불문율로 굳어진 상태였습니다. 1415년 이후 단 한 명도 생전에 사임한 적이 없지요. 단명(短命)하든 장수하든, 투병을 하든 생명이 다할 때까지 교황직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생전에 사임한 것도 당시의 복잡한 교회 정치 싸움과 관련 있습니다. 당시엔 3명의 교황이 난립한 상황이었고, 그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그레고리우스 12세 교황이 사임한 것입니다. 순수한 자의로 보기는 어렵지요. 이런 역사 때문에 각종 음모론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정통의 수호자였던 베네딕토 16세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혁명가’라고 부르는 분도 있습니다. 웬만한 진보적 성직자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지요. 앞으로 교황직을 수행하기 힘든 건강상태인데도 자리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즉위 직후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이란 전제로 미리 사직서를 써서 서명해뒀다고 합니다.

그의 ‘생전 사임 발표문’이 ‘혁명 포고문’이었다면, 선종 후 발표된 ‘영적 유언장’은 인간적이며 영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먼저 내게 생명을 주시고 혼란의 여러 순간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하느님은 내가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나를 일으켜주고 얼굴을 들어 다시 비춰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돌아보면 어둡고 지치는 이 길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보고 이해한다”고도 했지요. 그리고 주변의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생명을 주셨고,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사랑으로 안식처를 주셨다”며 부모님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수십년간 희생한 누나와 형(게오르그 라칭거 신부)에 대해서도 “올바른 길을 걷도록 이끌고 함께해줬다”며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곁을 지켰던 친구와 선생님, 제자 그리고 형제자매(신자들)에 대해서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국 독일과 제2의 고향이 된 이탈리아와 로마에 대해서도 감사했지요.

염수정 추기경(맨 왼쪽)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왼쪽 두번째) 및 주교단이 지난 1일 오후 명동성당에 마련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의 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적 유언장에선 흔들리지 않는 신앙 당부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잘못을 저지른 모든 이들에게 마음 깊이 용서를 빈다”면서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라”고 당부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로서 면모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과학, 합리주의, 실존주의, 맑시즘 등 정통 신앙에 대한 도전들을 언급하며 “예수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분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도전은 사임 발표문에서 밝힌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과 관련된 것이겠지요. 그는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영생의 거처로 받아주시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신학자다운 유언장입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2000년을 이어온 가톨릭의 저력’을 보는 듯했습니다. 때로는 보수적으로, 때로는 진보적으로, 신앙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세상의 변화도 받아들이면서 2000년 동안 이어온 가톨릭의 힘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수퍼스타 교황’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은 파격적 행보 덕분입니다. ‘파격’은 ‘격식을 깨뜨린다’는 뜻이죠.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격식을 엄격히 수호했기 때문에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이 더 크게 보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에서 신던 검정 구두를 그대로 신는 것까지 비교됐으니까요.(베네딕토 16세는 전통에 따라 빨간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핵심 교리에 관해서는 요한 바오로2세부터 베데딕토 16세 그리고 현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베네딕토 16세가 퇴임 후 현 프란치스코 교황과 견해 차를 보이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큰 마찰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큰 갈등이 있었다면 그의 생전에 이야기가 나왔겠지요. 베네딕토 16세는 전례 없는 ‘Pope emeritus’(일부에서 ‘명예교황’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전임 교황’으로 공식 번역합니다. ‘emeritus’는 영어로 ‘retired’ 정도의 뜻이라고 합니다.)로서 칩거하며 마지막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으로서 말이지요.

뛰어난 신학자로서 논문과 저술 목록만 적어도 책 한 권 분량이 된다던 베네딕토 16세였습니다. 그는 그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물러날 때를 스스로 알고 실천한 ‘생전 사임’ 하나만으로도 가톨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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