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성교육은 건강한 시민 길러내…성범죄 막기 위해서도 필요”[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최민영 기자 2023. 1. 3. 20:4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교육 전문가, 배정원 교수
성교육 전문가인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가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의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배 교수는 “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섹슈얼리티’와 ‘성소수자’가 삭제됐는데 유네스코가 제시하고 있는 성교육 가이드라인과도 맞지 않는다”며 “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세종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성 전문 패널 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청소년과 대학생, 부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성교육을 20년 이상 해왔다. 이화여대에서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인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단법인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상담부장과 연세성건강센터 소장,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성학회 명예회장이다. 저서로는 <똑똑하게 사랑하고 행복하게 섹스하라> <명화 속 성 심리> 등이 있으며, 최근 <십대를 위한 자존감 성교육>을 펴냈다.
4세부터 성교육하는 네덜란드
성 결정권 오히려 신중하게 행사
첫 성경험 세계 평균보다 늦어

한국 사회는 성(性)에 대해 이중적이다. 성을 상품화하면서도 정작 성을 정면으로 언급하는 것은 꺼린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2차 성징기 아이들은 성착취 영상물 등으로 비뚤어진 성을 접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학교에서는 성교육이 후퇴할 조짐마저 보인다. 성교육이 무분별한 성생활을 부추길 것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지난 20년 동안 성교육을 해온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는 “네덜란드나 독일의 경우, 성교육을 했더니 첫 성경험 시기가 오히려 늦춰졌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개인의 육체·정신·사회적 건강과 관계맺기를 아우르는 포괄적 성교육은 자아존중감 높은 건강한 시민을 길러낸다”며 “유네스코의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성의 즐거움과 소통의 필요성, 개인의 다양한 성 정체성 또한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이에 역행하는 교육은 아이들의 행복과도 멀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배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 한국 사회의 성이 혼란스럽습니다. 성매매도 공공연합니다.

“축복이자 행복, 즐거움과 재생산을 위한 건강한 성에 대한 담론이 매우 부족합니다. 육체를 저급하게 여기니 성을 더럽고 음란하다며 얕잡아 보는데, 성은 사실 인간의 근본이자 모든 것입니다. 기혼자들은 농담인 양 ‘가족(부부)끼리 그걸 어떻게 하냐’고도 하는데, 저는 ‘가족 아니고 누구와 하시려고요’라고 묻습니다. 성매매나 외도를 합리화하는 자기기만적 결과로 이어질 입버릇은 경계해야 합니다. 섹스와 사랑은 굉장히 가깝습니다. 콩깍지 씌이는 열정의 시기가 지나면 의지로 사랑해야 하는 시기가 오는데, 몸과 마음으로 대화할 줄 아는 성숙한 커플은 그렇지 않은 커플보다 결속력이 훨씬 높습니다.”

- 성폭력도 심각합니다. 지난해 인하대 성폭력 살인사건은 충격적이었어요.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신미약인 상태의 상대방과 성관계를 시도하는 건 범죄입니다. 자존심 있는 사람은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저는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더라도 섹스를 명확하게 동의한 상대방과 하는 게 너의 자존심에 도움이 된다. 아니면 너는 폭행범’이라고 가르칩니다. n번방 사건처럼 성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어릴 때 또래집단과 스마트폰을 통해 왜곡된 성 인식을 갖게 된 아이들이 성범죄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내 아이는 성착취 영상을 안 볼 거라 믿고, 설령 본다 하더라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학교 성교육 한참 뒤졌는데
보수 정부 들어선 이후 더 후퇴
가정도 학교도 손 놓으면 되겠나

- 성교육은 몇 살부터 필요합니까.

“미취학 아동에게 질, 자궁, 음경, 고환 같은 정확한 생식기의 명칭을 알려줘야 합니다. 성폭력을 비롯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아이가 경찰과 정확하게 의사소통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성기 보거나 만져도 안 되고, 네 성기를 보여주거나 만지게 해서도 안 된다. 병원 등 특별한 장소와 상황에서만 허락해야 한다’고 말해줘야 해요.”

- 최근 한 방송에서 계부가 어린 딸을 추행했다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아무리 어려도 딸들은 아버지가 몸 만지는 걸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너 어릴 때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며 길렀다’면서 억지로 뽀뽀하면 아이는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자라게 됩니다. 좋아하는 아빠가 나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으니 혼란스러운 거죠. 훗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성관계인데도 파트너가 원하면 응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나쁜 메시지를 주게 되는 겁니다. 아이가 어리더라도 ‘네가 싫다면 뽀뽀 안 할게. 네가 마음이 내키면 얘기해줘’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옳습니다.”

- 청소년기 임신과 출산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혼부·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나 지원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사고를 친’ 자녀들의 부모는 당황하고, 학교와 사회의 태도는 자업자득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잖습니다. 그런데 안전하게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먹는 약물 ‘미프진’의 국내 도입은 최근 무산됐어요.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필수의약품이자 전 세계 70여개국에서 처방되는 약인데, 수입약품 품목허가를 신청했던 제약사가 식약처의 거듭된 자료 보완 요청에 결국 자진 취하했습니다. 이러면 결국 청소년들은 위험한 불법 낙태약 복용으로 내몰리거나 원치 않는 출산을 하게 됩니다. 성교육도 제대로 안 하는 사회가 청소년들의 건강도 보호하지 않는 겁니다. 전반적 태도가 참 가혹합니다.”

스마트폰 통해 배운 왜곡된 성
성범죄에 아이들 노출 위험 키워
부모들은 훈육방법 몰라 당황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의 학교 성교육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피임기구 교육을 하려다가 학부모 항의에 직면하고, “선정적”이라는 보수단체의 비판 때문에 학교에 배포된 ‘나다움 어린이책’이 회수되기도 했다. 배 교수는 “어른들의 성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이들의 성 의식을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 네덜란드는 성교육을 4세에 시작한다고요.

“전 세계 평균 첫 성경험 연령은 13.6세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17세로 늦은 편입니다. 독일은 성교육을 강화한 이후 첫 경험 연령이 1년쯤 늦춰졌다고 합니다. 성교육을 통해 내가 언제쯤 성관계를 할 준비가 될지, 성관계를 지금 하는 것이 내 삶에 유리한지를 아이들이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성교육이 아이들의 조기 성경험을 부추긴다는 일각의 주장과는 다르네요.

“섹슈얼리티 교육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가치관과 판단력을 갖고 내 몸을 관리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섹스는 그중 일부에 불과하죠. ‘성교육은 민주시민 교육’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냐면 성교육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자아존중감이 튼튼해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타인의 존재와 존엄성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포르노적인 이미지가 넘쳐나는 사회야말로 아이들의 조기 성경험을 부추기는데, 이 아이들이 분별력을 갖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신중하게 행사하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포괄적 성교육’의 취지입니다.”

‘섹슈얼리티·성소수자’ 표현
개정 교육과정에서 사라져
교내 혐오 더욱 심해질까 걱정

- 섹스(sex)와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어떻게 다릅니까.

“예전에는 ‘섹스’는 성별과 관계 등을 포괄하는 단어였는데 이제는 ‘성행위’라는 뜻에 잡아먹혔습니다. ‘섹스’라는 단어에 성기 중심의 포르노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이들이 오히려 더 문제 아닌가 싶어요. 대안적 표현이 섹슈얼리티입니다. 섹스를 비롯해 육체·정신·사회적 건강, 관계맺기, 인생의 발달과정 등이 그 안에 다 들어갑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섹슈얼리티 교육입니다. 낙태 예방과 순결교육 중심의 학교 성교육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고 아이들의 행복에도 보탬이 되지 않아요. 2018년 유네스코는 신체접촉을 통한 즐거움과 성관계에서의 적극적 소통 필요성을 교육하라고 가이드라인에서 명시했습니다. 요즘 전 세계의 성교육 추세가 그렇습니다.”

- 그런데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중·고교 보건 교육과정에 수십년간 있던 ‘섹슈얼리티’ 용어가 삭제됐습니다.

“보수진영에서 ‘섹슈얼리티’가 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이 아닌 포괄적 성별, 왜곡된 성 관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해 빠지게 됐다고 합니다. 섹슈얼리티는 성별의 개념만이 아닌데, 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까 걱정입니다. 인권에 기반한 유네스코 가이드라인은 만 9~12세 청소년에게 개인의 성 정체성이 신체의 성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고 짚고 있어요.”

-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성소수자’라는 표현도 사라졌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 혐오나 차별에 더 많이 노출되기 마련이에요. 오랜 기독교 신자였던 저는 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인간 아버지도 내 자녀가 고달픈 삶을 산다면 등을 토닥일 텐데, 하물며 신께서 정체성 때문에 핍박받는 자녀를 끝내 벌하시겠습니까. 혹여 벌하신다 해도 그건 신의 영역이지 미약한 인간끼리는 서로 보듬고 돌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은 다 다르고, 그 다름이 차별의 이유가 되어선 안 됩니다. 개정 교육과정의 현장 적용까지는 아직 1년 남았으니 재논의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성은 인간의 근본이자 모든 것
타인과 건강한 관계 위해 필요
아이들에 정확한 정보 제공해야

- ‘교육과정’은 왜 중요한가요.

“교육과정은 향후 교육의 방향과 범위를 가름합니다. 현재 일부 교육청과 학교장들이 국제기준에 맞춰 포괄적 성교육을 수용하고 있으나, 전체 학교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이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학교 성교육은 전보다 오히려 후퇴하는 추세여서 걱정입니다. 성교육은 가정과 학교, 지자체, 정부가 합심해 건강한 미래세대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한데 가정에서는 정보가 부족해 손 놓고, 학교는 보수화 때문에 손 놓으면 되겠습니까.”

- 한국 사회가 유독 성에 대해 보수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을 보수적으로 억압하니 반대급부로 문란해지거나 변태가 많아집니다. 죄의식은 오히려 강박을 낳고요.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한국은 독일의 ‘68학생운동’ 같은 성 혁명이 없었고, 내면에 죄의식을 가진 시민은 정치권력 앞에서 굴종하기 쉬운 존재가 된다고 에리히 프롬, 마르쿠제 등의 이론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학교 성교육 관련 보수화 문제는 그래서 단순히 교육과정만의 문제로 보기 어려워요.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생에 걸쳐 건강한 섹슈얼리티를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삶의 온기가 있습니다.”

섹스리스 사회의 ‘보는 연애’ 신드롬


넷플릭스가 제작한 일반인 연애 리얼리티쇼 <솔로지옥2>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오감 중 시각과 청각만 쓰는 사회…섹슈얼리티 들어설 자리 사라져 혼인·출산율 씁쓸한 저하

지난해 연세대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서울 거주 성인 응답자 36%가 지난 1년간 성관계를 갖지 않은 ‘섹스리스’였다. 3명 중 1명꼴로, 20년 전에 비해 3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19~29세로 좁히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남성은 42%, 여성은 43%가 섹스리스였다. 이 같은 현상은 일반인이 출연하는 관찰형 연애 리얼리티쇼 급증과 대조를 이룬다. <솔로지옥> <돌싱글스>를 비롯해 지난해에만 20여개가 쏟아졌다. ‘하는 연애’가 아닌 ‘보는 연애’의 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는 “ ‘먹방’ 유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과 순간들을 보거나 보여주는 데 사회가 둔감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거리 두기 영향 탓인지 직접 연애를 하기보다는 화면 속 타인의 연애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상황이 강화됐다”면서 “정작 본인은 연애하지 않고 남이 하는 걸 보고, 남을 이러쿵저러쿵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 미디어 소비자들이 익숙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과 청각만 쓰는 사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단절 속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섹슈얼리티가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다. 혼인율과 출산율 모두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젊은이들이 섹스리스가 되는 건 “섹스를 덜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요즘 애들>의 저자 앤 헬렌 피터슨은 지적했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연애는 사치일지 모른다. 배 교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동’은 사라지고, 영화 <허(HER)>에서처럼 인공지능(AI)과의 연애로 대리만족하는 미래로 수렴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성에 대한 논의가지금 꼭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최민영 논설위원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