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칼럼] 노동 관련 시험문제들에 관한 소회

한겨레 2023. 1. 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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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키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데도 헌법이 단체행동권을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을 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위성을 막연히 설명할 뿐, 그러한 권리를 철저히 보장해야 결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묘년 새해 첫날인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올해 핵심 추진 과제로 노동개혁을 제시했다. 연합뉴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인간의 교양이나 지식의 수준을 숫자로 평가해 일렬로 세우는 비인간적 성적 입력 작업을 교수들 사이에서는 ‘채점지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상대평가 방식이어서 교수가 재량을 발휘할 여지도 없다. 높은 등급 학생 수가 정해진 범위를 한명이라도 초과하면 입력이 불가능해진다. 십여년 전 상대평가 방식이 반강제적으로 도입됐을 무렵, 애써 채점하고 입력한 점수가 컴퓨터에 의해 튕겨 나왔을 때의 ‘싸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학생들에 의해 대대로 전수되는 ‘족보’(기출문제들과 모범답안을 정리한 자료)에 올라갈 것을 각오하고, 답안을 채점하며 느낀 점 몇가지를 소개한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이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라는 문제에 많은 학생이 “노력을 통해 자격을 얻은 고급인력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등의 답을 적었다. 고급인력이 아니거나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읽힌다. 병원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개선돼야 환자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까지 기술한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간호사가 담당하는 환자가 1명 늘어날 때마다 사망률이 8% 증가한다는 미국·캐나다의 연구 결과도 있고, 간호인력이 담당하는 환자 수에 따른 최고 등급 병원과 최저 등급 병원 환자 사망률이 38%까지 차이 난다는 우리나라의 통계도 있다.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수를 법으로 제한하는 입법을 요구하는 주장도 있다”는 내용을 공들여 설명했지만, 병원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결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학생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비정규직 고용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묻는 질문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인간이므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답한 학생들이 많았다. 소득이 낮고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 많아지면 국내 소비력이 떨어져 경제성장의 저해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거나, 고부가가치 창출이 아니라 비정규직 고용 등 인건비를 줄이는 방식에 치중해 수익을 내는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고 국가 경제에도 유익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내용까지 설명한 학생은 많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국제통화기금(IMF)이 2004년 ‘한국 경제 주요 현안’ 보고서를 통해 ‘신규 고용의 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과도한 비정규직 고용이 한국 경제의 저해 요소가 됐다’는 분석을 했다”거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체계로 비정규직 고용을 강력하게 규제한 나라들의 경제가 안정적 성장을 지속했다”는 내용을 공들여 설명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은 듯한 답안들이 많았다.

세월호 사건과 비정규직 고용의 관련성을 묻는 질문에는 “세월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아서 무능했다”거나 “비정규직이어서 승객 구출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했다” 등의 내용으로 답한 학생들이 의외로 많았다. 노동조건이 열악해 더 좋은 직장에서 연락이 오면 곧바로 떠날 수밖에 없는 고용형태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평생직장으로 여길 수 있는 좋은 노동조건이었다면 정년퇴직 때까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기 위해 문제점들을 사전에 해결했을 것이므로 사고를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까지 기술한 학생이 생각보다 적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결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키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데도 헌법이 단체행동권을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을 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위성을 막연히 설명할 뿐, 그러한 권리를 철저히 보장해야 결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다. 한학기 동안 노동문제에 관한 수업을 듣고도 아쉬운 답을 적어낸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은 강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채점하며 거듭 반성했다.

앞에 예로 든 문제의 모범답안들은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초·중등학교 수업시간에 충분히 다뤄지는 수준에 불과해 시민들이 대부분 공감하는 ‘상식’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불순한 극소수 운동권’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방법으로도 움직이지 않던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노동운동을 공격하자 급반등할 수밖에 없다. 누구를 탓하랴. 결국 우리의 책임이다. 새해를 맞아 할 일이 더욱 많아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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