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시기 세계문학 번역·소개는 일제 저항 수단이었죠”

강성만 2023. 1. 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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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영문학자 김욱동 명예교수
김욱동 교수 저서 목록엔 <탈춤의 미학>이나 <광장을 읽는 7가지 방법> 같은 책도 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영문학 연구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영문학이 한국문학이나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김욱동 교수 제공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75) 서강대 명예교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7권 중 모두 15권을 번역했다. 그는 국내 대표적인 세계문학전집인 이 시리즈의 최다 번역자이다. 2012년 옮긴 어니스트 헤밍웨이 대표작 <노인과 바다>는 지금껏 48쇄를 찍었고, 2003년에 처음 문예출판사와 계약하고 번역한 미국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출판사를 바꿔 수십만권이 팔렸다.

그는 10년 전 서강대에서 퇴직한 뒤에도 매년 서너권씩 번역서와 문학 연구서를 출간했다. 1985년부터 모두 30여 권의 영·미 문학 작품을 번역했는데 이 중 10권은 은퇴 뒤 나왔다. 국제 저명 외국학술지(SCI급)에 실리는 영어 논문도 퇴직 뒤 매년 3편 가량 발표했다. 5년 전에는 미 학술지 <번역 리뷰>에 소설가 한강의 장편 <채식주의자> 번역 오류를 밝히는 논문을 실어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번역 외에 개인 저술도 100권 가까운 김 교수는 번역이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번역인가 반역인가> <번역의 미로>와 같은 번역을 주제로 하는 책과 최남선, 김억, 이양하, 정인섭 등 세계문학을 우리말로 옮긴 선배 번역가들을 다룬 책도 여러 권 냈다. 그가 최근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이라는 부제를 달아 낸 책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연암서가)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외국문학 수용 흐름을 살핀 책이다.

정년 뒤 연고도 없는부산 해운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겨오롯이 번역과 저술에 힘을 쏟고 있는 김 교수를 지난 12월23일 전화로 만났다.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표지.
김 교수가 옮긴 책들. 그는 번역서 출간 과정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제가 번역을 끝낸 뒤 출판사 쪽에 출판 의향을 타진합니다. 대개는 다 받아주더군요.” 김욱동 교수 제공

그는 이번 책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까지 이 땅의 작가와 외국문학 연구자들이 ‘세계문학의 광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최남선은 한국의 첫 종합잡지 <소년>을 1908년 창간한 데 이어 1914년 다시 낸 <청춘>을 통해 줄기차게 세계문학을 소개했다. 그 시절 <청춘> 독자들은 비록 일본어 중역에다 축역한 형태일 망정, <부활>(레프 톨스토이)이나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같은 세계문학의 정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1921년 낸 김억은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 보급에도 힘을 쏟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누구나 한 가지 말로 서로 자유롭게 통할 수 있는, 거기에는 정복자 일본도 없고 조선 같은 피압박 민족도 없는 평화로운 지구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저자는 일제강점기 문인 중 특히 시인 김기림의 세계문학 열망과 실천에 주목했다. 일본 도호쿠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김 시인은 “문화는 평화와 자유의 맹우로써 세계에 차오르는 쌀쌀한 적의와 오해의 감정을 깨뜨리고 녹이며, 그로하여 가로막히고 얼어붙은 빙하 지대에 끊임없이 ‘이해의 통로’를 뚫어갈 것”이라며 조선 문학계에 세계문학으로 시야를 넓힐 것을 외쳤단다. 시인 김동환이 편집인과 발행인을 맡은 월간종합지 <삼천리>는 1929년 창간 이후 작가와 외국문학 전공자 등을 대상으로 ‘내가 감격한 외국작품’ ‘외국에 소개하고 싶은 조선 작품’ ‘조선 문학의 세계적 수준’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 독자들의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식민 시기, 세계문학 열망의 근원이 뭐냐는 질문에 저자는 두 가지를 짚었다. “하나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죠. 드러내놓고 항거할 순 없으니 일제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세계문학 담론으로 저항한 거죠. 당시엔 사회 비판 성격이 강한 러시아 문학에 대한 정열이 대단했거든요. 반면 일본 문학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어요. 또하나는 일제의 검열로 조선문학 창작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없으니 세계문학으로 조선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생각이죠. 영문학자인 양주동 등 외국문학을 전공한 많은 이들이 한국 고전이나 전통문화를 연구했죠.”

그는 책에서 세계문학을 “세계 문단에서 새롭게 정전으로 평가받고 세계에 널리 유통되고 소비되는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지금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당당히 세계문학 반열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던 독일의 작가 괴테가 19세기 초에 처음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했죠. 괴테는 국가 사이의 평화를 위해선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며 세계문학의 도래를 반겼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문학의 가치는 뭘까? “인류가 향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는 문학이 바로 세계문학이죠. 자유와 평등, 상호존중과 같은 가치죠. 요즘 같으면 성인지 감수성을 이야기하고 흔히 타자라 부르는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태도이죠.”

3년 전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낸 김 교수는 “20세기 후반부터 세계문학 담론이 뜨고 있다”고도 했다. “예전엔 미국과 유럽 대학의 비교문학과 안에서 세계문학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세계문학과를 따로 설치하는 대학들도 늘고 있어요. 탈식민 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흐름이 바뀐 거죠. 세계문학을 다루는 연구소나 학술지도 생겨나고 있어요.”

“일본어 의존한 번역 오류 많아 직접”
‘세계문학전집’ 15권 옮겨 최다 번역
1985년부터 영·미 문학 30여권 소개
번역이론 연구 등 100권 가까이 저술

최근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펴내
“선배 번역가들 세계문학 열망 살펴”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 연구로 1981년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가 직접 번역에 뛰어든 데는 “책(기존 번역서)을 읽을 때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답답했기 때문”이란다. “제가 번역을 시작할 때는 일본어 번역에 의존한 번역서들이 많았어요. 오역이 너무 많아 내가 직접 나서자고 생각했죠.”

그 역시 중역한 책이 한 권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2018)이다. “이 소설을 한국어로 처음 옮긴이윤기(1947~2010) 선생이 삼중번역을 했거든요. 그리스어에서 프랑스어, 영어를 거쳐 번역된 책이라 프랑스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영어 번역본을 옮기면 좋겠다고 생각해 도전했죠. 마침 제 번역서가 나올 무렵 한국에도 그리스어 원전 번역서가 나왔죠.”

그는 일제강점기 김억이 그랬듯 실제 번역은 물론 번역이론 공부에도 줄기차게 관심을 쏟고 있다. 이론은 번역에 도움이 될까? “번역이론을 알아야 번역 오류도 줄일 수 있어요. 이론은 번역과 상호보완적이죠.” 그는 예를 하나 들었다. “번역이론 중에 자국화와 이국화란 개념이 있어요. 전자는 원천 텍스트를 우리 문화권에 맞게 옮기는 것이고 후자는 낯설지만 외국문학 작품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죠. ‘엎어진 우유 보고 울어도 소용없다’는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국화, 우유 대신 물로 바꾸면 자국화죠. 저는 세계문학 담론을 공부한 뒤로는 자국화에서 이국화 번역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원천 텍스트에 담긴 문화를 살려주는 게 좋은 번역이라고 본 거죠. 번역이론을 공부해서 그런 의식이 가능했죠.”

그는 “번역도 비판이 오갈 때 발전이 이뤄진다”고 본다. 그가 <채식주의자> 번역의 오류를 낱낱이 밝힌 것도 그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국의 현재 번역 수준을 묻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문학번역원 설립 뒤 이 기관에서 옛날보다 확실히 좋은 작품이 번역되고 있어요. 그래도 가끔 오역이나 졸역이 있어요. 양질의 번역가 양성에 정부나 민간기관이 더 노력해야죠. 번역은 문화를 옮기는 것이라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번역에서 외국어와 모국어 능력을 굳이 하나 꼽으라면 모국어를 택하겠다는 그는 가장 좋아하는 번역가로 고 이윤기 작가를 꼽았다. “비록 <장미의 이름> 같은 작품은 이탈리아어를 중역했지만 모국어 구사력이 뛰어나 번역에 힘이 있어요.”

그는 “가장 좋은 번역은 원작의 내용을 손상하지 않고 그 작품의 스타일이나 향기도 함께 옮기는 것”이라면서 “번역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계속 생기잖아요. 젊은 세대의 언어는 앞세대와 다르죠. 제 생각에 번역의 유통기한은 10년 같아요. 번역 언어가 낡았으면 새로 옮겨야죠. 물론 출판사에서는 잘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40년 가까이 번역 활동을 해온 김 교수는 번역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어휘에는 등가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 단어들을 저울로 달아보면 반드시 기웁니다. 예컨대 우리말 ‘눈치’에 딱 맞는 다른 언어의 말을 찾을 수 없어요. 영어 센스(sense)로 옮기지만 똑같지 않아요. 그래서 독일 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는 ‘번역 불가’를 이야기했죠. 번역가는 다만 차선을 향해 꾸준히 노력해야 오역을 줄일 수 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곧 나올 책에 대해 물었다. “정지용 김소월 이태준 최인호 김내성 등 영문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작가들을 살핀 책과 일제 때 문학비평가 최재서를 다룬 책이 올해 나올 것 같아요. 최재서는 친일행적도 충분히 다뤘죠. 또 미국 작가인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 <네이티브 선>을 지금 번역하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번역을 묻는 질문에는 <앵무새 죽이기>를 꼽았다. “번역에 공도 많이 들였고 너무 감동적이라는 독자 편지도 많이 받았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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