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병원 예약도 불가능”…‘세계의 모범’ 영국 의료 붕괴 위기

신기섭 2023. 1. 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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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 중 1명 “의사 못 만나 약 사먹고 만다”
16%는 ‘자가 치료’ 또는 비전문가에 의존
코로나·독감 동시확산에 대형병원 부담 커져
의료진 부족 등으로 영국이 자랑하던 무상 의료가 위기에 처했다. 구급차들이 런던의 한 병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상의료와 주치의 제도를 확립해, 세계 보건 체계의 모범으로 평가되던 영국 의료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주치의 격인 동네 의원 진료 예약이 어려워 ‘자가 치료’를 하는 이들이 많고,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해 사설 의료기관을 찾는 환자들도 늘고 있다. 코로나19와 독감 환자가 동시에 급증하면서 대형 병원들의 부담도 심각하다.

영국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의뢰로 여론조사 기관 ‘사반타 콤레스’가 영국 성인 2061명을 대상으로 의료 실태를 조사한 결과, 4명에 한명꼴로 동네 의원 예약이 안 돼 온라인 등에서 약을 사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응답자의 19%는 동네 의원에 갈 수 없어 응급실을 찾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와 함께 응답자의 16%는 동네 의원 예약이 안되면, 스스로 의료적 처치를 하거나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게 처치를 부탁한다고 답했다.

영국에서는 응급 상황이 아닌 한, 환자는 지정된 공공 동네 의원 소속 ‘가정의’(GP)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 가정의는 환자에게 약 처방전을 내주고, 추가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는 상급 병원 진료 의뢰서를 발급해준다. 약값의 일부는 환자가 부담하지만, 가정의의 진료는 무료다. 이런 체계는 1948년 도입된 ‘국가 보건서비스’(NHS)로 불리며, 이 서비스는 환자에게 직접 진료비를 받는 대신 세금으로 유지된다.

이번 조사에서는 공공 보건서비스가 부실해지면서,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하거나 따로 진료비를 내고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이들도 전체의 1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지난달 15일 통계청도 국민의 5%가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한 상태이며, 7%는 민간 병원을 이용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에드 데이비 자민당 대표는 국민들이 동네 의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건 ‘국가적 수치’라며 일부 지역에서는 가정의 대면 진료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주치의를 만나기 어렵게 되자 환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약을 사먹는, 충격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고 개탄했다. 데이비 대표는 보수당 정부가 그동안 국가 보건서비스를 방치하고 의사 충원 약속을 지키기 않아 의료 체계가 망가졌다고 주장했다. 자민당은 국민들이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가정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영국의사협회(BMA)의 가정의위원회 부의원장 리처드 밴멜라츠 박사는 의사 감소를 막지 못하면 자민당의 이런 요구를 실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영국이 지난 2020년 1월말 유럽연합(EU)을 공식 탈퇴하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국적의 의사들이 영국을 떠난 여파 등으로 지난해 11월 현재 전업 가정의 인력은 2015년 9월에 비해 1973명(약 6%) 감소했다고 협회는 밝혔다. 하지만, 보건부 대변인은 “2022년 9월 현재 가정의 숫자는 3년 전보다 2300명 많다”며 “3년 동안 동네 병원 담당 의료진도 2만1천명 충원했다”고 말했다.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 환자와 독감 환자가 동시에 급증해 응급실과 상급 의료기관 상황도 심각하다고 <비비시>(BBC) 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잉글랜드의 코로나19 입원 환자는 일주일 사이에 4500명에서 9500명으로 2배 이상 늘었고, 독감으로 입원한 환자도 한달 전(520명)의 7배를 넘는 3750명이었다고 방송은 전했다. 지난 6일 동안 응급실을 찾은 환자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 늘었다.

방송은 지난해 11월 국가 보건서비스 자료를 인용해, 응급 환자 3명 중 1명이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3명 중 1명은 4시간 이상 대기해야 하며, 입원이 필요한 환자의 40% 정도는 4시간 이상 병상에서 처치를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왕립응급의료협회(RCEM)의 에이드리언 보일 회장은 최근 연구 결과를 인용해 응급 처치 지연으로 매주 300~500명의 환자가 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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