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김은숙+송혜교는 왜 잿빛 복수를 택했나[OTT읽기]

스포티비뉴스 2023. 1. 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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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글로리'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스포티비뉴스=김상화 칼럼니스트]"종교가 없으면 좋은 점이 뭔줄 알아? 갈곳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야."

'시크릿가든', '미스터 션샤인' 김은숙 작가가 제대로 칼을 갈고 돌아왔다. 지난달 30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동시 공개된 ‘더 글로리’는 2020년 SBS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로 참패를 맛봤던 김은숙 작가가 2년 여의 절치부심을 뒤로 하고 발표한 신작 시리즈다.

'더 글로리'는 그동안 '파리의 연인', '시크릿가든', '태양의 후예', '쓸쓸하고 찬란하신 - 도깨비' 등을 통해 로맨스와 판타지의 적절한 조합으로 시청자들을 사로 잡았던 김작가의 이전 작품과는 결을 달리 가져간 드라마이다.

학원 폭력을 중심 삼아 20년 가까이 때를 기다려온 피해자의 처절한 복수극을 그리다보니 소재, 구성만 놓고 본다면 과거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을 집필했던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곤 믿기지 어려울 만큼의 변화가 찾아왔다.

여기에 '태양의 후예'로 호흡을 맞춘 주연배우 송혜교와 재회 역시 의아함을 자아냈다. 누구나 인정하는 톱스타지만 주로 멜로물 위주로 경력을 쌓아왔음을 감안하면 반가움 이전에 의외성이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총 8편 구성의 시즌1이 한꺼번에 공개되면서 의구심은 단번에 긍정적인 의미의 놀라움으로 탈바꿈한다. 기대 이상의 극본과 송혜교를 비롯한 여러 출연진들의 빼어난 연기력이 합쳐지면서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일으킨 것이다.

▲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출처 | 넷플릭스 '더 글로리' 예고편 캡쳐

잔혹했던 학원 폭력…송혜교의 처절한 복수

2004년, 여고생 동은(아역 정지소)은 연진(아역 신예은)이 이끄는 패거리 5인방의 집단 폭력의 먹잇감 신세였다. 자기 대신 화장실을 청소해주던 학우가 전학을 갔다는 이유로 강제로 일을 떠넘기는가 하면 이에 저항하는 동은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자행한다.

경찰에 신고해도 돌아오는 건 또다른 폭력의 시작일 뿐이었다. 연진 어머니의 절친인 경찰서장은 5인방을 훈방 처리하는가 하면, 담임 선생 또한 되려 동은을 나무라며 폭언, 손찌검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날이 갈수록 악질 급우들의 폭력이 극에 달하자 결국 동은은 자퇴서를 제출한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동은은 마음을 굳게 먹고 분식집, 목욕탕, 방직공장 등에서 악착같이 일하면서 학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결과 대입검정고시 및 수능 시험을 통과하고 교육대학교에 합격하기에 이른다.

어렵게 대학생이 된 동은(송혜교)은 우연한 기회에 의대생 여정(이도현)을 만나 그에게 바둑을 배우면서 자신이 세웠던 복수의 그림을 점차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교사가 된 동은은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 넣었던 연진(임지연) 일당을 향한 잿빛 앙갚음을 하나둘씩 해나가기 시작한다.

▲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출처 | 넷플릭스 '더 글로리' 예고편 캡쳐

고구마와 사이다…중간 문턱에 놓인 드라마

장르가 달라지긴 했지만 김은숙 작가 작품의 매력, 군더더기 덜하고 속도감 넘치는 전개, 그리고 찰떡 같이 달라 붙는 대사의 절묘한 조화는 '더 글로리'에서도 여전하다. "나의 체육관에 온 걸 환영해",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가자", "타락할 나를 위해...그리고 추락할 너를 위해" 등 동은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대사는 인간이길 포기한 '연진 5인방'을 향한 언어의 칼부림이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재미, 즐거움의 수단이었던 학교 폭력을 놓고 피해자와 가해자 간 전혀 다른 생각과 입장은 '더 글로리' 시즌1 속 복수극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일말의 반성조차 없는 그들을 향해 동은은 어찌보면 가해자들과 닮은 듯 다른 방식으로 응징을 가한다.

스승이길 포기했던 옛 담임 선생은 결과적으로 동은의 대학 선배이자 그의 아들에 의해 사실상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연진 패거리 중 가장 서열이 낮았던 명오(김건우)에겐 열등감과 자존심을 건드려 가해자들 모임에 균열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 동료 중 누군가에 의해 처단되게 만들었다.

자신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도 동은은 학창 시절 그를 옥죄었던 인물들에게 압박감을 선사하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 서로를 배반하게끔 유도하는 일종의 큰 그림을 마련한 것이다.

치밀한 설계를 바탕으로 동은은 연진의 딸 예솔이가 다니는 학급의 담임 교사가 되면서 연진의 숨통을 조금씩 틀어 막는다. 5인방 중 그녀와 불륜 사이였던 재준(박성훈)에겐 예솔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게 만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즌1·2 합쳐 16부작 구성인 관계로 이야기는 이제 중간 정도에 도달한 셈이다. 이렇다보니 극의 초반 처참한 학교 폭력으로 쌓여진 고구마급 분노의 감정은 아직 제대로 해소되기엔 이른 시점이기도 하다. 동은을 마구 짓밟았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죽음에 이르긴 하지만 사이다 수준의 통쾌감을 얻기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즌2 까진 아직 두달여 남짓 제법 긴 기다림이 수반된다.

▲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출처 | 넷플릭스 '더 글로리' 예고편 캡쳐

동은에게 바둑은 무슨 의미일까?

'더 글로리' 시즌1에서 제법 비중있게 다뤄지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바둑이다. 주여정에게 바둑을 배우면서 동은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터득한다. 이와 별개로 연진과 결혼한 건설회사 사장 도영(정성일)은 바둑 공원을 만들만큼 바둑에 애정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동은이 최근까지 행복했던 도영의 삶에 돌맹이를 던지게 된 매개체 역시 바둑이다.

흔히 사람들은 바둑과 인생을 비유하곤 한다. 바둑은 집을 많이 지어야 이기는 종목이다. 다양한 전략이 수반되는 일종의 '병법서'와 마찬가지이다. 이기고 지는 과정을 복기하면서 바둑 기사들은 기다림을 터득한다. 동은이 바둑을 배운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10여년 이상 복수할 수 있는 시기만을 노리면서 동은은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을 읽는 바둑 고유의 전술 기법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집을 하나둘씩 지으면서 나를 짓밟았던 이들이 그동안 느낀 행복, 지위, 권력까지 차근차근 빼앗아 오는 것이다.

빈 공간에 집을 지으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파악하는 건 바둑의 기본 공격 자세이다. 현재까지 동은은 착실하게 연진 일당의 빈틈을 파고 들면서 절묘한 수를 곳곳에 배치해놨다. 시즌2에 도달할 때 동은은 과연 원했던 복수의 결말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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