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농구가 좋았고 지금은 주부로 만족합니다”

김종수 2023. 1. 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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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68)] '미들슛의 여왕' 조인현

 

“미들슛 여왕요? 그런 말을 들어본 것 같기는한데…, 왠지 좀 부끄럽고 과한 별명이 아닌가싶네요. 프로에서 미들슛을 특기로한 것은 맞는데 저 말고도 잘 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우유빛깔 등 예쁘게 불려주시는 팬분들도 적지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저를 대표하는 유명한 별명 하나를 딱 집어내기는 어렵네요”


농구 명가 현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지은 조인현(49‧175cm)에게 현역 시절 별명을 물어보자 돌아온 답이다. 조인현은 현대가 원클럽우먼이다. 전주원, 김영옥 등 워낙 팀내에 쟁쟁한 스타플레이어가 많아 유명세에서는 다소 묻힌감도 있지만 현대를 응원했던 팬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이름중 하나다. 선수 생활의 시작과 끝을 모두 현대에서만 보냈기 때문이다.


“(김)성은이의 성자, (정)윤숙이의 책받침 등 팀내에서 통하던 애칭? 호칭? 그런 것은 있었지만 별명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주로 선배 언니들이 후배들의 특징을 살려 만들어주곤했는데 어디까지나 저희끼리 부르고 말았으니까요. 하나같이 너무 구수해서 팬분들이나 언론에서 부르기에는 다소 멋도 떨어지고요(웃음)”


그녀를 가리켜 언론에서는 미들슛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종종썼다. 별명에서 바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미들슛을 잘쐈기 때문이다. 이종애를 가리켜 ‘블록슛의 여왕’이라고 부르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인현의 별명에는 다소 아픈 사연도 있다. 그녀가 미들슛을 잘 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무릎부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이유도 크다.


선일여자고등학교 시절까지 그녀는 4번보다는 3번에 가까운 플레이의 소유자였다. 3점슛을 많이 안쏜 것은 마찬가지지만 실업 무대서 보여준 움직임과는 차이가 컸다. 일단 기동력이 좋았고 활동량을 많이 가져가는 타입이었던지라 부지런하게 코트를 오가며 림어택을 즐겼다.


“수비수 한두명 제치고 돌파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만큼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었어요. 페이스업으로 레이업슛을 올려놓던가 아님 수비 움직임을 보면서 스탑 점프슛을 쏘는 등의 플레이가 익숙했습니다. 포스트 인근에서 일대일도 나쁘지않았어요. 그러다가 실업무대에 오자마자 무릎을 다쳤고 이전같은 플레이가 어려워졌어요. 그렇다고 골밑에서 정통 빅맨처럼 힘으로 플레이하기에는 사이즈나 몸상태 등도 여의치않았죠”


결국 파워포워드로서 미들슛을 자주 던지게 된 것은 선수로서 살아남기위한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펼쳐온 플레이를 바꾸고 그렇게라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놀라웠다. 그녀는 실업 농구대잔치에서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프로에서는 1998 친선, 여름 리그를 잠깐 뛰고 은퇴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코트에서 에너지넘치는 플레이를 통해 끊임없이 싸워온 장면을 기억하는 팬들은 여전히 현대가의 스타를 언급할 때 그녀의 이름 역시 빼놓지않는 모습이다.
 

 

“평범한 주부, 너무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은퇴 후 딸하나 아들하나 키우면서 평범한 주부로 지내고있어요. 아들은 고등학교 올라가고 딸은 대학생이에요. 잠깐 5년 정도 여자부 대학리그에서 경기부 기록원을 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5년여가 지나갔네요. 사실 은퇴 후에는 농구 쪽으로 무엇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의 제 생활에 너무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기록원이라도 하면서 농구 쪽에서 잠시 일을 하게 됐죠.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은퇴 후 한참 있다가 무릎 쪽에 대수술을 하게됐어요. 수술 자체도 컸거니와 재활기간도 워낙 길었습니다. 집에만 있다보니 사람이 정말 우울해지더라고요. 밖으로나가서 무엇이라도 해야할 상황이었던거죠. 그러다가 여자대학리그가 창설되고 기록원을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경험도 쌓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저에게 베스트는 역시 남편과 아이들 챙겨주는 가정주부인 듯 싶어요. 현재는 그래요.(웃음)

Q.바로 선수 시절 조인현으로 넘어가보도록 할께요. 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때 키가 크다고 시작하게 됐어요.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선일초등학교에서 각 학교를 돌면서 키큰 아이들을 대상으로 자원을 모집하고 테스트하던게 있었어요. 거기서 합격을 하면 선일초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당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선생님 따라가서 엉겹결에 테스트를 보고 농구를 하게 된 케이스에요. 당시 키도 좀 있었고 운동능력도 어느 정도 된다고 판단하셨나봐요.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사실 농구가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어요. 155cm정도 됐으니까 또래 중에서는 확실히 크긴 컸었죠. 당시에는 그게 고생길이 될 줄은…,(웃음)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았나요?
포워드였죠. 3점슛을 잘 안던졌다 뿐인지 다른 플레이에서는 전형적인 3번 포지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파워포워드도 맡았는데 정통적인 4번이라기보다는 스윙맨스러운 플레이도 많이 했으니까 요즘 기준으로보면 3.5번 그렇게 표현될 수도 있겠네요.

 

 

Q.어떤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였나요? 예전 선수들은 동영상 찾기도 힘들어서 경기 모습을 보기가 너무 어렵네요.
일대일이 좋았어요. 잘 달리는 축이었던지라 기동성을 바탕으로한 페이스업도 좋았고 피벗플레이도 자신있었어요. 3점슛은 시도 자체부터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드라이브인 들어가다가 멈춰서서 쏘는 점프슛이나 미들라인에서 던지는 슛은 상당히 정확했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몸싸움하면서 피벗플레이로 수비수를 벗겨내고 올려놓는 슛도 자신이었어요. 그러다가 무릎을 다치면서부터 상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Q.부상은 선수들에게 숙명처럼 따라다니던데, 크게 다쳤나봐요?
치명적이었습니다. 고3 겨울에 현대에서 1순위로 지명해줘서 계약이 모두 끝나고 데뷔를 준비하던 시점이었어요. 연습 경기 도중에 십대인대가 끊어졌어요. 현대가서 수술을 받기는 했는데 회복이 안되더라고요. 그로인해 플레이 스타일 자체를 바꿔야 했으니까요. 파고들고 벗겨내고 그런 플레이가 어려워졌습니다. 다리가 시원치않아졌으니까요. 머릿속에서 어떻게 플레이 해야 하는지 그림이 그려지고 몸에 배인 농구 세포가 그것을 요구해도 몸뚱이가 따라주지않으니까요. 크게 다쳐본 선수들은 다들 공감하실거에요. 익숙하고 잘 할 수 있는데 되지않는다는 절망감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잘나갔다가 실업무대에서 기대만큼 날아다니지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죠.

“부상과 수술 이후 모든게 다 바뀌었습니다”

Q.정신적으로도 힘들었겠어요.

말해 무엇하겠어요.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농구를 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간 이후 농구하는게 정말 즐거워졌습니다. 기량이 쭉쭉 늘고 원하던데로 플레이가 됐으니까요. 주변에서도 칭찬해주고 그런게 동기부여가 됐죠. 모든 선수가 다 그렇잖아요. 이왕 농구의 길로 들어선 이상 실업무대에 가서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데뷔 문턱에서 다치는 바람에 저도 좌절했고 팀에도 미안하게 됐죠. 어쨌든 예전처럼 잘 달리고 잘 움직일 수는 없게됐지만 어쩌겠어요. 무엇인가 저만의 경쟁력을 찾아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장점이던 미들슛을 더욱 갈고 닦아서 주특기로 삼게 됐습니다. 몸만 멀쩡해서 예전처럼 휘젓고 다니는 플레이가 가능했다면 미들슛과 더불어서 상대 수비를 더 괴롭힐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늘 가지고 있었죠. 특기를 오픈하고 있던 상황인지라 아무래도 한계를 느낄때도 종종 있었거든요. 창 한자루를 능숙하게 쓰는 것보다 칼도 있고 도끼도 있는 쪽이 전쟁에서 유리하잖아요.

 

 

Q.현대가 빅맨 쪽에서 유독 부상자가 많기는 했네요.

그렇죠. 현대가 (전)주원 언니를 비롯해 나중에 합류한 (김)영옥이까지 앞선 가드라인이 참 좋았잖아요. 주원언니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선수고 영옥이도 전 소속팀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못하다가 현대에와서 기량이 만개했죠. 제가 생각해도 상대적으로 빅맨 쪽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었던 듯 싶어요. 저도 그렇고 (김)성은이도 부상만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은 빅맨이 될수 있던 자원이었거든요. 모든게 다 핑계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 부상은 모든 것을 힘들게하는 것 같아요.

Q.학창시절에 라이벌 혹은 눈에 띄게 기억나는 동기가 있을까요?
라이벌이라고 하기 보다는 눈에 띄는 동기들이 좀 있었죠. 저희 학번에 잘하는 선수들이 꽤 많았거든요. (정)선민이야 당연히 알고 계실거고요. (조)현정이도 잘했죠. 수피아여고에서 뛰던 조미화라는 친구도 있었는데 득점력이 좋았어요. 한번 불 붙으면 쉽게 쉽게 고득점을 올렸던 기억이 나요. 그 외에도 재능많고 잘했던 선수들이 상당했지만 다들 부상으로 고생하고 그러다가 일찍 은퇴하던가 고등학교 시절의 실력을 못보여주고 그랬어요. 확실히 부상여부가 커리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선민이가 대단하죠. 그렇게 집중수비를 당하면서도 꾸준하게 잘했으니까요.

Q.이른바 주먹구구식 재활 환경도 영향이 있었을 듯 싶어요.
그렇죠. 세세하고 체계적인 것들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죠. 지금이야 워낙 의료 시스템이나 재활 환경이 좋잖아요. 당시에는 어지간히 아파도 참고 뛰고 치료를 받았다 싶어도 통증이 덜하다싶으면 경기에 바로 투입되고 그랬던지라 기본적인 관리 자체가 잘 되지않았어요. 혹자는 지도자 분들께서 어지간히 아픈 것 아니면 뛰게 만든 부분을 지적하기도 해요. 물론 그런 문제도 있었죠. 하지만 선수들부터도 정말 못 걸어다닐 것 같지 않은 이상 자발적으로 코트에 나서려고 했어요. 선배들도 그래왔고 그것이 당연한줄 알았으니까요. 더불어 그렇게 못 뛰다보면 내 자리가 없어질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고요. 누구 한사람을 탓하기보다는 그런 문화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길게 보기도 힘들었고 길게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였죠. 그래도 현대같은 경우는 배려를 많이 해줬어요. 덕분에 저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름대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26살 정도까지는 뛰었으니까요. 그때는 그 정도가 평균치였어요.

Q.미들슛이 그렇게 좋았는데 3점슛은 시도 자체가 거의 없었더라고요.
그러게요.(웃음) 손끝 감각이 좋아서 미들슛은 좋았는데 3점슛을 던져야겠다 그런 생각은 잘 안해본 것 같아요. 팀 전체적으로 3점슛이 아쉽다 그랬으면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팀내에 외곽슛이 빼어난 선수가 정말 많았어요. 저까지 던질 필요가 없었죠. 지금처럼 3점 비중이 높은 시절도 아니고 제가 던지게 된다면 오히려 포지션적으로 복잡해질 수도 있었지 않나 싶어요. 아마 감독님부터 ‘뭐하는거야?’그러셨을 듯 싶은데요. 오히려 제가 겹치지않고 미들슛을 던져서 팀에 더 도움이 됐고 감독님께서도 그런 플레이를 밀어주셨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드라이브인이나 원드리블 점프슛에 능하던 시절에도 3점슛을 거의 안 던졌으니까요.

 

 

”초등학교 이후로 맞으면서 농구하지는 않았습니다“

Q.당시에는 여자농구계도 폭언, 폭력이 장난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문화가 있기는 했죠. 아무래도 지금과는 여러 가지면에서 달랐으니까요. 선생님들마다 다르기도 했고요. 저는 주로 임영보 선생님 밑에서 농구를 했어요. 예전에는 호랑이선생님으로 유명했다고 하던데 저는 맞거나 그래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오히려 많이 예뻐해주셔서 선생님하면 고마운 생각부터 납니다. 아무래도 말년시절이라 유해지신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웃음) 아! 그런 것도 있을 듯 싶어요. 아무래도 농구도 사람이 하는 것인지라 서로간의 합같은 것도 있잖아요. 좀 더 칭찬이 많이 가는 선수가 있고 아님 질책이 자꾸 가는 선수가 있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저같은 경우 임영보 선생님하고는 잘 맞았던 것 같은데 진성호 선생님과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Q.그분도 맹장으로 유명한데 막 때리고 그랬나요?
그런 것은 아니었고요. 그냥 서로간 잘 맞지 않았나고 해야 할까요. 진성호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농구에 제가 잘맞는 조각이 아니었던 듯 싶고 저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신바람이 나지않았고 그렇다고 봐야 겠죠. 실제로 선생님 오고나서 한 대회인가 잠깐 뛰고 은퇴 수순을 밟았으니까요. 직접적으로 많이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오시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후배들이 저희 집으로 피신도 오고 그랬었으니까요. 저같은 경우 초등학교때 조금 맞은 것 외에는 이후 중고등학교, 실업 시절에는 거의 맞지않고 농구를 했어요. 왜냐면 제가 견디지를 못해요. 맞으면 농구를 더 못하는 것은 물론 아예 맛이 가버리는 스타일이라서요.(웃음)

Q.어쩌면 임영보 감독이 있었다면 선수 생활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겠네요?
쭈욱 저를 중용해주시던 분이라 기회를 계속 주셨을 가능성도 있었을 듯 싶어요. 하지만 장담은 못하겠어요. 저는 나이를 먹어가던 시점이었고 당시 여자농구는 세대 교체가 빨리빨리 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는 임영보 선생님 밑에서 주로 농구를 했던지라 그분이 편하고, 그분도 저의 사용법을 잘 아는 것 만큼은 사실이었죠. 다들 자신만의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저에게 선생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맙고, 주변에 알려진 만큼 많이 폭력적이지도 않으셨어요. 팀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Q.플레이 스타일도 바뀌었을 정도니 부상으로 정말 고생이 심했을 듯 싶어요.
십자인대 다친 것 외에 다른 쪽은 아주 크게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물론 십자인대 한방이 너무 컸지만요. 당시 현대에서 많은 배려를 해줘서 일본에 가서 수술을 했어요.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일본 쪽이 좀 더 스포츠 의학이나 재활은 발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나름 재활까지 잘 마치고 와서 4년 가까이 잘 뛰었죠. 워낙 부상으로 고생한 선수들을 많이 봐서 그 정도만 해도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지금까지도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Q.지금까지도요?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어머니 농구대회라는게 있어요. 은퇴한 선수들이 오랜만에 농구도 하면서 친목도 다지고 그런 대회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농구를 잊고 살았다고해도 예전에 함께 농구했던 이들과 그렇게 한바탕 뛸 수 있다는 자체가 설레는 기분을 느끼게 했어요. 그래서 출전을 했는데 대회를 뛰고나니까 무릎이 퉁퉁 부어오르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병원을 찾았더니 검사결과 십자인대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십자인대가 닳아서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십자인대가 얇아진 상태에서 연골과 연골판으로만 그동안 지탱을 했던 거죠. 그 결과 2009년 당시 대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어요. 십자인대 재건수술을 받고 연골 내측 외측 다 찢어진 부분도 꿰메야했고 연골도 닳아서 천공술도 했죠. 무릎에 할 수 있는 수술은 다했던 것 같아요. 재활만 1년 가까이 걸렸으니까요. 사실은 지금도 힘들어요. 남들처럼 산타고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해요. 농구도 하면 안될 듯 싶고요. 다 꿰매놓은 상태라 반월판 자체가 얼마없어요. 무리하다가는 큰일날 수 있죠.

 

Q.선수 시절에는 수술후 ‘무릎이 많이 심각하구나’느끼지 못했나요?
아프기는 했어요. 그래서 경기에 나설 때는 테이핑도 엄청 많이한 선수로 유명했죠. 트레이너가 테이프를 감아주잖아요. 어떨 때는 발목에서 허벅지까지 둘둘 감고 나설 때도 많았어요. 보기에 조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어쩌겠어요. 아픈데…, 어지간한 고통은 일상처럼 달고살았으니까요. 그래서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고요. 본격적으로 파워포워드로 뛰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죠.

Q.익숙하지않은 포지션을 맡게됐는데, 공격은 그렇다치더라도 수비에서 어려움이 더 컸을 듯 싶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였어요. 4번 수비가 쉬웠다는 것은 아니지만 3번 포지션에 있던 것보다는 나았다고 볼 수 있죠. 파워포워드는 골밑 위주로 수비가 이뤄지지만 스몰포워드 수비를 하려면 외곽까지 많이 돌아다녀야 하잖아요. 떨어진 기동력과 탄력을 감안했을 때 3번 수비로 나섰다면 아예 구멍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4번같은 경우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라도 할 수 있지만 3번에서는 상대 선수를 따라다니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요.

Q.무릎이 아프면 발목 등 다른 부위까지 도미도처럼 부상이 이어지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도 있죠. 다행히 저는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던 듯 싶어요. 일단 제가 무척 신경을 썼으니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테이핑도 엄청 신경써서 하고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무리한 플레이도 하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그랬죠. 벌벌하면서 경기를 뛴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했죠. 다시 제대로 다쳐버리면 저는 물론이거니와 팀에게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으까요. 무릎을 다치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잔부상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더 신나서 힘차게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부상을 당한 이후에는 페이스 조절도 하고 조심성도 엄청 많아진 듯 싶어요. 그나마 그렇게 조심을 해서 이후 4년이라도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요. 조금 괜찮다고 예전처럼 했었다가는 분명 크게 문제가 생겼을 것 같아요.

Q.상당수 여자 선수들을 보면 기분좋게 은퇴한 케이스가 많지않더라고요. 어떻게 은퇴는 기분좋게 하셨나요?
크게 나쁠 것도 없었어요. 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 되어서 은퇴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제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니까요. 다만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등의 아쉬움은 남았으나 이것은 비단 저뿐만 아니라 선수들이라면 다들 가지는 감정이지 않을까요. 대부분 선수들 자체가 승부욕이 워낙 강한지라 어지간히 잘했어도 만족보다는 아쉬움의 감정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예전처럼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라고 느낀 부분이 커서에요.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더라도 예전보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가면 저절로 ‘떠날 때가 됐구나’생각이 들죠. 여전히 어느 정도의 경쟁력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후배들보다 월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팀 입장에서는 같은 값이면 젊고 쌩쌩한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게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조인현을 기억하고 있을 팬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깜짝 놀란게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여전히 계시더라고요. 사실 누가 이제 저를 기억하겠냐 싶었거든요. 팬이었다고 연락주신 분은 물론 저도 모르는 제 사진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으세요. 저로서는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힘들기도 했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 중 하나인데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잊지 않고 계신 팬들의 존재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농구라는 매개체 속에서 선수와 팬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이런게 세상의 인연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저도, 그분들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앞으로도 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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