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절반을 산 당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주간경향] 성지연 작가(53)가 ‘오십,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주간경향 연재 글을 쓴 건 2019년 8월부터 2022년 1월까지다. 2년5개월이다. 그 결과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책 제목은 <어른의 인생수업>. 맞다. 어른도 배워야 한다. 인생, 삶의 의미를 찾는데 이것이 정답이라고 가르쳐주는 학교는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먼저 살아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기자에겐 마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지난여름 어느 날 밤의 일이 뇌리에 남아 있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그친 심야,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휘적휘적 퇴근길을 재촉하다가 경향신문사 근처 동네에서 밤 산책을 나온 성 작가 부부와 마주쳤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하는 막연한 우울감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이었다. 사이좋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부가 밤 산책에 나설 수 있는 여유, 솔직히 부러웠다. 기자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지난여름 한밤중에 길 가다 만난 기억납니까.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늦은 시간에 그러니까 부부 중 한 사람이 ‘밤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하고 선뜻 ‘그래’ 하고 둘이 나설 수 있다는 게요. 보통 안 그렇지 않나요. 서로 뜻 맞기도 어렵고,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예정 없이 나서기도 쉽지 않고.
“기억나요. 남편과 둘이 자주 걷는 편입니다. 밤에만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등산도 같이하고 그래요.”
-책 이야기를 해보죠. 제1 인생과 제2 인생을 구분해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제1의 인생이 가족을 위해 희생한 인생이라면 제2의 인생은 나의 의미를 찾는 인생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우리가 태어난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잖아요. 보통 부모 사랑의 결실로 세상에 던져진 건데, 철이 들면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와 같은 것들을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은 종교에서 말하는 소명(calling)의식 같은 걸 넘어 그런 의미 부여 없이는 살기가 힘들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 나의 의미를 찾는 여정에서 추상 수준을 낮추는 것이 개인적인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젊었을 때 종교에 기운 적도 있지만, 인생 후반전에서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0세 인생이라는 말도 쓰지만 기대수명이 엄청 늘어났잖아요. 50, 60세가 되면 이제 다른 삶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 50세 이전에는 다른 의무가 많잖아요.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갖고. 그 전에는 학교도 다녀야 하고. 이런 것을 끝내 놓고 오히려 홀가분한 측면도 없진 않을 겁니다. 제 경우만 보면 그 이후엔 어떻게 살까에 대한 계획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서점에 가보면 100세 인생을 다룬 책도 있고, ‘40세 됐다, 어떻게 할까’, ‘50세엔~’ 하는 책도 많잖아요. 트렌드라기보다 정말 수명이 늘어난 시대에 앞으로 어떻게 살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돼버렸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도 한번 되돌아보면서 변화된 현재도 검토해봐야 하는데 과거에 배운 것들, 그리고 과거에 기대하고 어른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렸거든요. 나이 50 이후에 중요한 것들은 일단 자기를 보호해줄 재정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삶의 공허함, 다시 말해 내가 이뤄놓은 가족, 이뤄놓은 업적, 직업적인 것도 많겠지만 그 공허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를 많이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건 언제였습니까.
“2003년쯤이었어요.”
-학위논문은 어떤 주제였어요.
“최인훈 소설 연구였어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개인에 대한 연구.”
-박사학위 이후에도 글을 계속 썼습니까. 습작이든 일기든.
“개인적인 글은 계속 썼어요. 컴퓨터에 써놓기도 하고 노트에 쓰기도 하고. 필사(筆寫)도 좀 해보고.”
-그러니까 그런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요즘 ‘컬러 테라피’라고 색칠하는 컬러링북도 꽤 인기를 끌고 있던데요.
“저는 필사도 꽤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책에서 인생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소개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책에서 도움을 많이 얻었으면 한다는 맥락에서 썼습니다. 실은 잘 잊어버리거든요. 책 한 권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글을 잊지 않기 위해 저장해놓으려고 조금씩 하다 보니 필사를 즐기게 됐습니다.”
-삶의 의미나 ‘나는 왜 살까’와 같은 것들을 고민할 때 책 말고도 다른 깨달음의 수단도 있지 않을까요. 예컨대 일뿐 아니라 놀이나 취미생활에 몰두하면서도….
“그럴 수 있어요. 책을 탈고하고 보니 쓴 내용 중 행복에 관한 것이 많더라고요. 가지고 있는 책도. 그걸 보면서 ‘내가 되게 행복하고 싶어했구나’를 느낍니다. 내가 그렇게 충만하게 살고 있지 않아 행복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 서점에 가도 행복에 관한 책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더라고요.”
-나이 50을 살면서 깨달은 행복관(觀)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경제적 준비도 중요하긴 해요. 모두 가능한 건 아니니까 국가나 사회가 기본적인 최저선은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로 다뤘던 건 그 이후의 일입니다. 사실 치안이 너무 불안정하다거나 아이들을 키우기 안 좋다거나 환경적으로 건강에 위해가 되는 일은 그 기본선이 채워지지 않은 것이고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경제적인 것에 너무 치중해 돈을 많이 벌어놓으면 나중에 행복하겠다는 쉬운 결론입니다. 50대까지 돈을 엄청 열심히 벌어 정말 뭐같이 벌어 어떻게 쓴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살아놓고 보니 불가능한 기획이거든요. 책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내 멋대로 읽고 인용했는데, 막내딸의 진심을 자기가 읽어줘야 하잖아요. 지금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강제로 하라고 한다고 인간관계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랑은 적립하는 것이라고 적어놨는데 나이가 몇 살이 되든 계속했어야 하는 일인 거예요. 내 삶에서 디딤돌이라고 한다면 ‘경제 다음으론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건가’인데, 가족도 내가 만든 가족도 있고 내가 태어나 속한 원가족과의 관계도 중요해요. 그리고 친구관계도 중요하다고 봐요. 나이 50 먹고 내가 너무 공허하다고 친구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친구관계도 평생을 거쳐서 가꿔나가는 것 같습니다.”
-‘오십은 장년의 끝에 서서 노년을 건너다보는 나이’라고 책에 썼는데 어떤 노년이 건너다보입니까.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금 노년을 보고 우리 노년을 예측하면 안 된다’입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여생의 길이와 우리가 겪게 될 여생의 길이가 너무 다릅니다. 우리 앞세대, 부모세대는 전쟁도 겪은 세대이긴 하지만 그분들은 그래도 30~40대에 사회가 이런 거다 생각하면 그 사회 속에서 계속 50대, 60대를 살았거든요. 우리는 지금 젊었을 때 봤던 세상하고 현재 닥치는 세상이 너무 달라요. 우리는 리포트를 손으로 써냈던 세대 아닙니까. 내 기억으로는 대학 4학년쯤 되니 한 클래스에 한둘이 컴퓨터를 막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일단은 우리 부모세대를 보고 내 노년을 예측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또 우리가 그 나이가 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젊다고 봐요. 그래서 그냥 자식 크는 거 보고 사는 게 안 되고 뭔가 의미를 찾는 일도 해야 하고, 또 뭔가 즐길 만한 취미도 있어야 하고 뒷받침할 경제적 토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젊어서 읽었을 때는 그런 책인지 몰랐어요. 그냥 고기를 잡나 안 잡나에 더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노인이 고기를 잡아서 뼈가 다 발라진 생선을 가지고 오는 과정이 그렇다면 성공일까 실패일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중꺾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있잖아요. 정말 그래요. 중요한 건 내가 패배하지 않는 거거든요. 생선을 잡고 얼마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인에게는 그 바다가 삶의 터전이잖아요. 노인이 바다를 생각하는 애틋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삶이긴 하지만 그 바다와 삶을 사랑하면서 사는 행위잖아요. 잘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대한 사랑, ‘잘살고 잘 늙고 잘 죽기.’ 서문에도 썼는데 ‘잘’이라는 것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이긴 한데 어떻게 하는 게 잘사는 것이고 잘 늙는 것이고 잘 죽는 것인가 여러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대목도 있어요. ‘50이라는 나이는 마음을 먹기로 했으면 그걸 실천하는 나이’라고 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에겐 거꾸로 ‘50이라는 나이가 이젠 마음먹어도 되지 않는구나’를 그제야 깨닫게 되는 나이 아닌가요.
“그렇기도 하죠. 50이 되고 나도 힘들었던 것이 이제까지 쌓아온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제일 컸고 운신의 폭이랄지 그런 것도 없었어요. 새로 직업을 시작할 나이도 아니고 교육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 50대가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 당시 힘들기도 했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리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나인홀트 니버의 기도문 ‘평온의 기도’ 속 일부 문구(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신에게 구했다)를 옮겨 적어놨어요. 바꾸는 용기와 할 수 없는 건 이제 받아들이고 놓는 평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입니다. 그런 지혜가 필요하긴 해요. 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면 정말 마음이 힘들 때가 오죠. 그러면 종교에도 귀의하고 다들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보통 그걸 놓는 순간 늙어버리는 거 아닐까요(하하).
“그렇기도 합니다. 늙어버리는 것이 맞아요. 시몬느 보부아르가 괜히 늙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열정을 지키라고 한 건 아닐 겁니다. 그것도 와닿더라고요. ‘나는 늙었으니 이것도 못 해, 저것도 못 해’ 하는 것은 구분하는 지혜가 없는 거죠.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서 하는 것도 지혜겠죠.”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합니까.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애는 다 크고 집을 떠나고 이제 둥지는 비었는데 학위 마치고 사회생활은 잠깐 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찍 경력이 단절됐는데 사회에 돌아가려고 하니 갈 곳이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글쓰기였어요. 직업을 가지고 돈 버는 일만으로 사회가 영위되는 건 아닙니다. 살림하고 애를 키우는 것도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나름 바쁘게 살아왔는데 이게 뭔가’ 하며 공허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은 일종의 조연자로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글쓰기를 한 것이죠. 크게 뭘 벌리거나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 경력단절 여성 중 누군가 내 책이나 이 인터뷰를 읽는다면 아마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인생은 기니까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너무 이런 것에 몰두하지 말고 현재 가진 것에서 일단 출발해보자 이렇게요. 자, 모두 지금부터 새로운 경력을 만들어보자고요. 그래야 후회가 없지 않겠습니까.”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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