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el & Mountain] 뜨끈한 한옥 온돌에서 포만감…뱀사골 하산길은 뱀처럼 길었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지리산과 설악산 중 어디를 더 좋아하는지' 질문을 받게 된다. 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어느 한 곳을 콕 집어 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지리산보다 설악산을 훨씬 더 많이 가본 기자는 사실 설악산파다. 설악산은 수십 번 넘게 가봤지만 지리산은 세 번 정도 가본 게 전부였다.
민족의 영산이라는 아우라 때문일까, 지리산은 항상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지리산의 거대한 산군과 끝없는 능선을 생각하면 까마득한 우주를 바라보는 것 같은 아득함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두려움과 동경이 섞인 감정 때문인지 지리산은 쉽게 발길이 안 가는 산이었다.
취재 산행차 생에 네 번째로 지리산을 오르게 되었다. 전통 한옥 체험시설 남원예촌에서 1박을 한 뒤 노고단에서 일출을 보고 반야봉을 거쳐 뱀사골로 하산하는 일정이다. 지리산에 대해 큰 관심도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막연히 "성삼재에서 오르는 거니 가벼운 산행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숙소에서 눈을 감았다. 이러한 무지와 오만은 다음날 엄청난 업보로 되돌아왔다.
노고단은 이미 한겨울
이번 지리산 산행 베이스캠프는 남원시내에 위치한 전통 한옥 체험시설 남원예촌이다. 남원예촌은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한옥 명장들이 전통 방식 그대로 지은 문화재급 시설이다. 해가 질 무렵 숙소에 도착했는데 보랏빛 석양 아래 따뜻한 조명으로 불을 밝힌 한옥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운치 있다. 친구들에게 숙소 사진을 찍어 공유하니 "완전 개꿀 직업"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디럭스 온돌룸을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구들장이 재현되어 있는 방은 포근하고 정겹다. 전통 방식 그대로 지어진 한옥이지만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추어 편리함과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두터운 요를 깔고 누우니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일어났다. 산에 가기 위해서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은 없었다. 남원 시내에서 성삼재까지는 차로 40분 정도 걸린다. 성삼재 가는 길에 뱀사골 하산 지점인 반선에서 이번 산행을 함께하는 지미란·이기주씨와 합류했다.
반선에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20분 정도 오르면 해발 1,100m에 위치한 성삼재다. 탁 트인 하늘에 희미하게 박명이 밝아온다. 평일 새벽인데도 성삼재주차장에 차들이 꽤 있다. 노고단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어둠속에서 번쩍인다. 이날 해가 떠오르는 시간은 오전 6시 50분. 주차장에서 찌뿌둥한 몸을 풀고 노고단으로 향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 오르는 길은 대부분 포장도로다.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며 몸에 열을 올린다. 여명에 짙은 보랏빛을 띤 하늘에는 아직 별이 총총하다. 이날은 200년에 한 번 천왕성이 달 뒤로 숨는다는 개기월식일이었다. 홍시처럼 붉은 보름달이 지평선 부근에 부풀어 올라 잠들 준비를 한다.
한 시간 정도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노고단의 관문인 노고단고개다. 노고단은 탐방로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 미리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5시부터 17시까지 노고단을 탐방할 수 있으며, 마지막 입장은 16시다. 하루 최대 탐방 인원이 1,870명이라 예약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노고단탐방지원센터에서 QR코드를 찍고 입장한다. 이곳에서 노고단 정상까지는 700m 거리의 완만한 오르막이다. 노고단 오르는 길은 나무가 없는 능선이라 볼을 에는 칼바람이 사방에서 불어 닥친다. 가져온 옷을 모두 껴입고 후드를 덮었는데도 춥다. 서울은 아직 완연한 가을 날씨라 패딩을 챙겨오지 않았는데 노고단은 벌써 한겨울이다.
월간<山> 베테랑 사진기자 양수열 선배가 옷을 한 벌 건네준다. "나중에 정말 추우면 입겠다"고 말하니 선배가 "춥기 전에 입어야지!"라고 한마디 한다. 재킷을 한 겹 더 껴입으니 살 것 같다. 선배는 "일출 취재 때는 무조건 패딩을 챙겨 와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일러준다.
노고단 정상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고단은 여러모로 완벽한 일출 산행지다. 해발고도가 1,500m인데다 사방이 탁 트여 떠오르는 해를 조망하기 좋다. 게다가 성삼재에서 완만하고 편한 길을 따라 고도 400m 정도만 오르면 된다.
추위와 씨름하며 10분 정도 기다리니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자줏빛 태양이 떠오른다. 막 솟은 태양은 크고 일렁인다. 태양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움직이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떠오른다. '정말 지구가 돌고 있구나'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짙은 자주색이던 태양은 점점 밝아지다 이내 불타는 주황색이 된다.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온 대지가 붉게 물든다. 보통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기 마련이지만 정신없이 몰아닥치는 칼바람과 추위에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재빠르게 촬영을 마치고 후다닥 노고단고개로 하산한다.
얕잡아 봐선 안 되는 반야봉 오르는 길
노고단고개로 내려서니 바람이 잠잠해진다. 이제부터 지리산 등줄기를 따라 걷는 일만 남았다. 겹겹이 껴입었던 외투를 벗어 정리하고 능선으로 접어든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지리산이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깨어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따스한 햇볕이 온 능선을 노랗게 물들인다.
아담한 돌길을 따라 반야봉으로 향한다. 저 멀리 반야봉이 머리위에 부스스하게 운해를 덮어써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다. 아직도 단풍을 매단 나무들은 햇볕에 물들어 울긋불긋 빛난다. 반달곰의 본거지답게 능선 도처에 산죽이 빽빽하다. 지리산을 종주할 때는 항상 반달곰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기분이 맴돈다.
노루목고개에서 반야봉 방향으로 오른다. 반야봉 사면에는 백색의 고사목들이 듬성듬성 서있어 새치 가득한 50대 아저씨의 머리 같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정상까지는 1km 거리. 1,732m 높이의 정상까지 300m 정도 올라야 한다.
반야봉은 주능선에서 편도로 왕복해야 해서 다니는 사람이 드물다. 1km라고 얕잡아봤는데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다. 오르막은 가파르고 중간에 짧은 암릉 구간도 있다. '이쯤 왔으면 정상이겠지'라는 생각을 세 번 정도 하니까 반야봉 정상이 나타난다. 반야봉은 지리산 제2의 봉우리라 불리며 전라북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설악산보다도 높다.
반야봉이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첫 번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가 지리산 산신인 마고할미와 결혼했는데, 나중에 반야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반야봉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번째는 옛날에 한 스님이 뱀사골에 있는 이무기를 물리치고 절의 안녕을 가져온 뒤 '반야심경'에서 이름을 따 반야봉이라고 지었다는 설이다.
반야봉은 서쪽으로 노고단과 정령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일몰 명소로 꼽힌다. 정상에서 중봉을 거쳐 쟁기소로 하산하는 능선은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2026년까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정상 주변은 샛길 출입을 막기 위해 펜스가 둘러져 요새화되어있다. 노고단에서부터 정신없이 걷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반야봉에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뱀사골 하산길은 뱀처럼 길다
반야봉에서 삼도봉 방향으로 하산한다. 삼도봉에는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가 각 면에 적힌 삼각뿔 형태의 금속 조형물이 있다. 삼도봉에서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내려가면 뱀사골 하산길이 있는 화개재다. 화개재에서 뱀사골 하산 표지판을 확인하는데 띠용! 뱀사골탐방지원센터가 있는 달궁까지 '9km'라고 적혀 있다.
9km면 웬만한 당일산행 왕복 거리다. 하산코스가 이렇게 긴지 미처 몰랐다. 지리산 산행은 고도가 높은 성섬재에서 출발하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야봉은 짧게 갔다 오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리산 능선은 생각보다 길었고, 반야봉 오르는 길은 고됐다. 지리산 문외한이 지리산을 얕봤다가 큰코다쳤다.
땅속으로 아득히 꺼진 뱀사골로 들어선다. 하산하는데 왼쪽 반야봉 정상 아래에 황금빛 뭔가가 반짝인다. 워낙 이질적이고 인공적이라 한눈에 봐도 인위가 미친 흔적이다. 자세히 보니 웬 건물이 생뚱맞게 있다. 지리산을 수십 번 넘게 온 지미란씨가 묘향대라고 일러준다.
토끼봉을 마주보고 있는 묘향대는 신묘하다고 알려져 수백 년 전부터 도인들이 수행해 온 곳이다. 해발 1,500m에 위치해 우리나라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주변에 등산로도 없어 접근이 쉽지 않은데 나중에 TV에 방영된 편을 찾아보니 스님과 개 한 마리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개재에서부터 끝없는 하산길이 이어진다. 뱀사골 등산로는 길에 바위가 많아 자꾸 돌부리에 발이 걸린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계속 걷다 보니 지압매트 위를 걷는 것처럼 발바닥이 아프다.
상류에서는 물이 흐르지 않았는데 하산하면서 좌우로 지계곡이 하나둘씩 합류하더니 이내 계곡에 쏴아쏴아 물소리가 가득하다. 비가 안 온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산은 도대체 어디서 물을 뿜어내는 건지 신기했다.
뱀사골이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뱀이 많이 잡혀서 뱀사골이 되었다는 설, 계곡이 뱀처럼 구불구불해서라는 설,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 곳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뱀사골은 정북향이라 음침하고 볕이 잘 들지 않는다. 등산로가 길고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과 거리가 멀어 평일에는 이곳을 오르내리는 등산객이 거의 없다.
두 시간 넘게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내려오니 점점 경사가 완만해지고 계곡에 볕이 든다. 좁고 난잡했던 계곡에는 이제 거대한 바위와 암반이 가득하다. 뱀사골 내려가는 길에는 볼거리가 많다. 간장소부터 시작해 제승대, 병풍소, 병소, 뱀소, 탁용소, 오룡대가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걸었더니 피로가 몰려온다. 따스한 오후 햇빛이 내리쬐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엉덩이만 붙이면 바로 잠들 것 같다.
하류에 접어들자 일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탁용소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도로가 포장된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 가파른 길로 올라가면 해발 800m에 위치한 와운마을이다. 구름도 누워 간다는 뜻의 이 마을은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국난을 피해 산과 계곡을 헤매다가 피난처로 정착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천연기념물인 지리산 천년송이 있다.
와운마을 삼거리에서 데크길을 따라 2km 정도 걸어 내려가면 드디어 산행 종착지인 반선이다. 성삼재에서부터 반야봉을 거쳐 반선까지 총 20km를 걸어왔다. 이처럼 노곤한 산행이 있었나 싶다. 하산지 근처에서 산채정식을 먹어치우고 숙소인 남원예촌으로 되돌아간다. 정겨운 띠살문을 열어젖히니 후끈한 온기가 온몸을 감싼다. 뜨끈뜨끈한 온돌 바닥에 누워 '씻어야 하는데'를 되뇌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교통
현재 남원과 구례에서 성삼재로 가는 대중교통편은 없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성삼재로 가는 버스(함양지리산고속)가 운행 중이다. 금요일 제외한 평일과 주말에 1회(23:00), 금요일 3회(22:50, 22:55, 23:00) 운행한다. 요금 3만7,800원. 구례에서 성삼재까지 택시비용은 5만 원 정도다. 구례 택시(지역번호 061) 783-0078, 781-3900, 782-3342.
남원에서 뱀사골공용터미널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1일(07:35~16:50) 3회 운행한다. 남원에서 뱀사골탐방지원센터까지 택시비용은 5만 원 정도다. 남원택시(지역번호 063) 625-7777, 632-0090, 625-2848.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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