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위를 걷다 울주 고헌산] 일곱 남매 거느린 영남알프스의 어머니 산
"울산까지 찾아 갈 만큼 고헌산이 그리 유명한 산인가요?"
"글쎄요. 주변에 워낙 대단한 산들이 많아서요. 그런데 최근 울주군에서 영남 알프스 9봉 완등자들에게 은화 주는 이벤트를 하면서 갑자기 유명해졌어요."
울산 울주군이 2020년부터 코로나로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를 명목으로 영남 알프스 9봉을 완등한 사람들에게 31.1g짜리 은화를 주겠다는 야심찬 이벤트를 열었다. 이 사업은 전국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영남알프스 9봉 앞에 줄 세우면서, 순식간에 대박을 쳤다. 그 덕에 고헌산과 이웃한 문복산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등산이라는 행위가 6만5,000원 상당의 은화 획득을 위한 상업성에 내몰리면서 '최단코스 정상 인증', '1박 2일 9봉 정상 인증' 등 정상 따먹기 위주로 변질되는 등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에 울주군은 인증방법을 나이 만 14세 이상, 하루 최대 3개 봉우리로 제한했으며, 예산이 부족해 은화도 4만 원 상당의 은도금 메달로 바꿨다.
"결국 고헌산이 이 은화 덕을 톡톡히 본 셈이죠. 어찌됐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싶어요."
영남알프스의 첫 관문 고헌산
지난 11월 12일 경부고속도로 건천IC를 나와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에 들어선다. 20여 년 만에 찾은 산내면은 중심 도로변의 산내불고기단지 외는 예전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산자락은 거의 대부분이 전원마을로 탈바꿈했다.
고헌산 들머리인 외항재는 대현마을에서 북동쪽 600m 거리에 있다. 고개 너머 200m 아래 자리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평일임에도 20여 대의 차가 주차돼 있다.
"외항재가 고헌산 최단 코스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원점회귀 산행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영남알프스 9봉 인증을 위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고헌산 산정은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덮여 있다. 비옷을 배낭에 챙겨 넣고 외항재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오른 산줄기를 탄다. 백두산에서부터 내달려온 낙동정맥 마루금이다. 완만하고 단조로운 능선길이 잡목 숲을 따라 정상까지 이어진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황량함을 더할 뿐이다. 간혹 아이 많은 흥부네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가지를 둔 소나무들이 잡목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빼앗는다. 쭉쭉 뻗어나간 낙락장송은 아닐지언정 그 모습이 일품이다.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인데도 나름 멋있네요. 황량한 산에 저 소나무라도 있으니 눈이 심심하지는 않네요."
그때였다. 갑자기 잡목 숲에서 홰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꿩들이 숲을 헤집고 사라진다. 또한 머리 위에선 딱따구리가 타악기 소리를 연출하며 숲의 정적을 깬다. 얼마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부리를 가졌는지 그 쪼아대는 소리가 숲에 쩌렁쩌렁 울린다. 딱따구리가 모처럼 반가운 벗이라도 만난 듯 산정을 향하는 필자의 발걸음에 맞춰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면서 한참을 맴돌다가 날아간다.
은화 이벤트에 갑자기 유명세
고헌산 어깨쯤 올라섰을 때 큰 수목들이 점차 사라지고 길가 옆에 돌탑이 서너 개가 연이어 나타나고 조망이 활짝 트인다. 하지만 미세먼지가 자욱해 아쉽게도 주변 산들만 흐릿하게 보일뿐이다. 외항재 아래 양지녘 산자락에 자리한 대현리 전원마을이 햇살을 받아 유독 환하게 빛난다. 그 너머에 문복산이 야트막하게 솟아 있다.
고헌산 서봉에 올라선다. 남쪽의 울주군 상북면 너머로 가지산, 능동산, 간월산, 신불산이 병풍을 이룬다. 그 너머에는 천황산과 재약산 봉우리가 솟아 있다. 산의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고헌산 정상은 여전히 짙은 먹구름에 덮여 있다.
고헌산高獻山(1,034.1m)은 낙동정맥이 영남알프스에 이르러 처음 빚은 산이다. 영남알프스의 시산始山이자 모산母山인 셈이다. 영남알프스는 어미산인 고헌산과 이웃한 아비산인 문복산이 나란히 서있고, 두 손으로 맞잡은 장남격인 가지산을 필두로 7남매 봉이 형형색색의 산세를 뽐내며 솟아 있는 모양새다. 고헌산과 문복산은 영남알프스 9봉 중 가장 낮고 남루하지만 부모산으로서 묵묵히 솟아 멀리 우뚝 솟은 자녀산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고헌산과 문복산은 어미산과 아비산으로서의 형세 또한 뚜렷하다. 문복산은 그 상징인 드린바위가 마치 거대한 남근석처럼 산 앞에 솟구쳐 있다. 고헌산은 폭포가 연이은 대통골을 비롯해서 밀양강의 발원지인 큰골샘터, 태화강의 상징적인 발원지로 알려진 용샘 등을 거느린 음기가 충만한 산이다. 그밖에도 홈도골, 곰지골, 삽재골, 골안골 등 수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특히 고헌산 동봉 산불감시초소 아래 해발 980m 동쪽 사면에 자리한 용샘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서봉에서 고헌산 정상은 지척이다.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르는 주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그 완만하게 펼쳐진 능선에 데크 전망대가 놓여 있고, 그 끝 정상에는 돌탑이 세워져 있다.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완만하고 둥그스름하게 능선이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고헌산은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불렸다.
주능선 데크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시퍼런 어린 소나무들이 반겨준다. 파릇파릇한 어린 솔잎이 계절감을 잊게 한다. 황량한 벌판에서 갑자기 봄을 맞이한 기분이다. 데크길이 끝나면서 산정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산을 오르는 사이 바람이 하늘의 시커멓게 뒤덮은 구름을 말끔히 치웠다. 널찍하고 둥그스름한 정상엔 커다란 하얀 정상석과 돌탑이 세워져 있다.
낙동정맥의 가장 큰 산군, 영남알프스
고헌산은 언양의 진산으로 옛적에는 높은 산을 의미하는 '고언산, 고언뫼. 고디기'라 불리기도 했다. 백두대간 매봉산(1,303m)에서 갈래친 낙동정맥이 백병산(1,259m), 통고산(1,067m), 백암산(1,004m), 주왕산(720m), 가지산(1,240m), 금정산(802m)을 거쳐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도상거리 350여 km의 산줄기 중에서 영남알프스는 가장 큰 산군을 이루는데, 그 시작점이 이 고헌산이다.
낙동정맥은 고헌산을 일군 후 외항재~가지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영취산~정족산~천성산~원효산에 이른다. 가지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운문산을 이루고, 남으로 뻗은 산줄기는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을 빚는다. 그리고 외항재에서 올라친 산줄기가 문복산이다. 이렇게 빚어진 영남알프스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만 해도 9개에 이른다. 가지산(1,240m)을 중심으로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고헌산(1,034m), 운문산(1,188m), 문복산(1,015m) 등 울산, 양산, 밀양, 청도, 경주 등에 걸쳐 솟구쳐 있다. 이 거대한 산군의 수려한 산세와 이색적인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 만하다 하여 영남알프스라 불린다.
산정에서 고헌사로 향해 곧장 내려선다. 정점에서 고헌사까지 수직으로 뻗은 길이다. 그만큼 길은 가파르고 미끄럽다. 벌거벗은 산은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길을 완전히 뒤덮었다.
"길도 없는데 하산길이 맞아요? 꼭 이리 내려가야겠어요? 발을 딛을 수도 없는데요."
낙엽 옷을 갈아입은 사면은 그저 거친 오지의 숲일 뿐이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라곤 전혀 없다. 낙엽 아래의 길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내가 긴장감에 똑바로 걷지 못한다. 길이 가팔라 중심을 잡느라 허벅지가 뻐근하고 발바닥에서 불이 나고 엄지발톱이 빠질 듯 아프다고 엄살이다. 당장이라도 다시 정상에 올라 다른 길로 하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듯하다. 한참을 내려서니 산 사면을 길게 둘러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그 앞에는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린 제단바위가 놓여 있다. 반갑기 그지없는 쉬었다 가기에 딱 좋은 바위이다.
"여기 제단바위 위에서 숨 좀 돌립시다."
치마폭 두른 듯 곱디고운 고헌사 단풍숲
고도가 낮아지면서 가파른 산길도 다소 누그러졌다. 누렇고 말라비틀어진 낙엽도 많지 않아 길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다가 한순간 곱디고운 치마폭을 두른 것처럼 단풍숲이 펼쳐진다. 가을 끝물의 가장 황홀한 색감을 지닌 형형색색의 단풍이다. 수수하면서도 화려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단풍숲이 가을 햇살에 한껏 멋을 뽐내고 있다. 은은한 빛깔이 마치 동화 숲을 걷는 듯하다.
"어마나 여기 좀 봐요. 이렇게 큰 오동나무는 세상에 처음 봐요. 나중에 우리 딸애 시집갈 때 베어서 장롱이라도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네."
앞서가던 아내가 갑자기 오동나무 아래서 멈추더니 고개를 치켜들고 말한다. 나무의 굵기가 어른 팔 둘레의 1.5배는 될 법한 굵은 오동나무다. 키도 20m쯤은 될 듯싶다. 옛날에는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시집갈 때가 되면 장롱을 짜서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오동나무는 성장속도가 빠르다. 비올 때면 고향집 마당 앞 오동나무에서 떨어진 커다란 이파리를 우산 삼아 쓰고 뛰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완만하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고헌산 중턱에 자리한 고헌사에 내려선다. 산신각과 대웅보전, 범종각이 제각각 흩어져 있다. 고헌사는 조계종 석남사의 말사로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대웅보전의 '보寶'란 대웅전과 달리 삼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더불어 극락세계로 이끌어주는 아미타불과 병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약사여래를 함께 모신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고헌사의 가을은 세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처럼 더욱 찬란하기만 하다.
가을빛은 범종각 주변에서 절정에 달한 후 고헌사를 휘돌아가는 골안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신기마을을 향해 단풍이 짙게 깔린 깊고 수려한 골짜기를 따라 타박타박 내려선다.
산행길잡이
고헌산은 영남알프스의 시산始山이자 모산母山이다. 백두대간 매봉산에서 갈래친 낙동정맥이 백병산, 통고산, 백암산, 주왕산, 가지산, 금정산을 거쳐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도상거리 350여 km의 산줄기 중에서 가장 큰 산군인 영남알프스를 일구는데, 그 시작점이 이 고헌산이다. 영남알프스는 이 고헌산을 시작으로 외항재~가지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영취산~정족산~천성산~원효산에 이른다. 그리고 가지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운문산을 이루고, 남으로 뻗은 산줄기는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을 빚는다. 외항재에서 올라친 산줄기가 이웃한 산이 문복산이다. 이렇게 빚어진 영남알프스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만 해도 9개에 이른다.
고헌산을 오르는 최단 코스는 낙동정맥 상의 고개인 외항재와 소호령이다. 고헌산을 중심으로 북쪽에 자리한 소호마을 동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2020년 울주군에서 영남알프스 9봉 완등 이벤트로 은화를 내걸면서 고헌산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외항재나 소호령을 들머리로 삼아 원점회귀 한다. 그 외 등산로는 상북면 궁근정리 신기마을 고헌사 코스와 두서면 차리마을 코스가 있는데, 대부분 하산코스로만 이용한다. 등산로는 외항재와 소호령 코스만 정비돼 있고, 나머지는 길이 희미해서 헷갈리기 쉬우니 주의하도록 한다. 외항재 들머리의 경우 고개 정상에 자리한 왕복 2차선 도로변이 비좁아서 갓길 주차가 아예 안 되며, 주차장은 재 너머 200m 아래에 있다.
교통
서울-중부내륙고속도로-상주영천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건천IC. 20번 국도와 921번 지방도를 타고 대현마을에 도착한 후, 600m 거리인 외항재에 오르면 고개 너머 200m 아래 주차장이 있다. 날머리인 고헌사 아래 신기마을에서 외항재까지는 택시비가 7,000원쯤 나온다.
맛집(지역번호 054)
고헌산 들머리인 외항재 아래 산내불고기단지 (울주군 상북면 대현리)에 맛집이 많다. 암소마당(0507-1322-6925, 불고기정식), 푸른가든(751-7051, 한우육회비빔밥), 대가숯불(751-6875, 가마솥곰탕), 하얀집(751-6033, 비빔밥), 광바우숯불생고기 (불고기정식, 751-6365) 등.
*월간산 12월 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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