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검은 토끼 해’... 토끼 와인·토끼 위스키·토끼 소주에 취하네
최근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사자성어를 고르라면 단연 ‘교토삼굴(狡兎三窟)’이 뽑힌다. 익히 알려졌듯 교토삼굴은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놓는다’는 뜻이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한성희 포스코건설 사장, 김영환 충청북도 지사, 윤희상 전 국회의장,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을 포함한 수많은 정·재계, 종교계 인사들이 올 해 신년사에서 일제히 이 사자성어를 꺼냈다.
트렌드 전문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도 저서 ‘트렌드코리아 2023′에서 교토삼굴을 언급하며 올해 키워드로 ‘토끼처럼 뛴다(RABBIT JUMP)’를 꼽았다.
새해 벽두 주류업계에서도 토끼는 주연감으로 떠올랐다. 올해가 굳이 ‘검은 토끼의 해’ 계묘(癸卯)년이라서가 아니다. 주류업계에서는 그동안 토끼가 가진 이미지를 차용한 술을 꾸준히 만들어 왔다. 막걸리부터 소주, 와인,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주종도 다양하다. 미국 워너브라더스 애니메이션 루니 툰에 나오는 벅스 버니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끼는 ‘순하고 귀여우면서도 머리 좋은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 와이너리 도멘 두 페레 귀요(Domaine du Pere Guillot)는 토끼가 유럽에서 다산(多産)의 상징이라는 점에 착안해 와인병 겉면에 토끼만 크게 그려진 ‘더 래빗 시리즈’를 선보였다.
프랑스와 영국처럼 사냥이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국가에서는 토끼를 잡으면 가문이 번창하거나, 그 해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여긴다. 토끼는 임신 기간이 채 한 달도 안된다. 한 번에 새끼를 4~8마리씩 낳는데, 심지어 출산한 다음날 바로 또 임신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일 년에 출산을 네 번에서 여섯 번까지 반복한다.
이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 소개를 참조하면 실제로 이 와이너리에는 산토끼들이 가족 단위를 이뤄 포도밭을 제 집처럼 뛰어다닌다. 포도나무 주변에 야생 동물이 뛰논다는 것은 ‘농약을 뿌리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더 래빗 시리즈는 소매 가격이 3만5000원에서 5만원 정도로 편하게 마시기 좋은 와인에 해당한다.
페르노리카코리아가 지난해 10월부터 들여오기 시작한 미국산 버번 위스키 ‘래빗 홀(Rabbit Hole)’은 말 그대로 토끼 굴을 의미한다. 토끼는 여러 굴을 팔 뿐 아니라, 굴을 깊게 파기로도 유명하다.
래빗 홀 증류소 창립자, 카베 자마니안(Kaveh Zamanian)은 성공한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였지만, 아내가 위스키에 열광한다는 이유로 돌연 위스키 양조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당신이 나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깊은 토끼 굴 속으로 데려가는군요’라고 기대 섞인 한탄을 뱉었다. 이 위스키 이름은 여기서 왔다.
래빗 홀은 버번 위스키 중에서도 개성이 강한 편이다. 버번 위스키는 미국에서 최소 51% 이상 옥수수를 증류해 만든 위스키를 말한다. 공식적으로 버번(Bourbon)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반드시 불에 태운 새 참나무통에서 숙성을 해야 하고, 병에 들어간 위스키 도수는 40도를 넘어야만 한다. 조미료와 색소 같은 첨가물은 일절 넣어선 안된다.
전직 심리학자가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지켜 만든 래빗 홀 위스키는 현재 엄청난 인기몰이 중이다. 데이터 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래빗 홀은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슈퍼 프리미엄 위스키 브랜드로 꼽혔다.
우리나라 주류 소비자가 ‘토끼’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술은 토끼(Tokki) 소주다. 이 소주는 원소주 등장 이전에 증류식 소주 시장 열기를 달궜다. 토끼라는 이름은 미국인 브랜든 힐(Brandon Hill) 대표가 지었다.
그는 2010년 말 한국에 들어와 여러 양조장을 여행한 후 뉴욕으로 돌아간 뒤 5년 동안 한국 전통주에 대한 연구를 계속 했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2011년이 ‘토끼의 해’라, 2016년 선보인 첫 작품 이름도 ‘토끼’ 소주가 됐다.
토끼 소주는 발매 초기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어 ‘뉴욕 여행 인증 술’로 유명세를 탔다. ‘희석식 소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소주를 빚었다’는 미국인 이야기는 미국인 뿐 아니라 한국인들 뇌리에도 깊이 새겨졌다. 토끼 소주는 지난 2020년 충청북도 충주에 농업법인과 양조장을 설립해 수입 소주에서 전통주로 자리를 바꿨다.
특히 계묘년을 상징하는 검은 토끼에 걸 맞는 ‘토끼소주 블랙’은 도수가 40도에 달하는 고도주다. 쌀 3킬로그램(kg)을 써야 토끼소주 블랙 750밀리리터(ml) 한 병을 빚을 수 있다. 젊은 층에 인기 많은 홍대 라이즈 호텔에는 아예 토끼소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토끼 바’까지 들어섰다.
글로벌 대형 주류 브랜드들은 구매력이 부쩍 커진 동양권 소비자를 겨냥해 12간지에 맞춘 한정판 제품을 내놓는 추세다.
여러 미디어와 작품을 통해 외국인들에게도 점차 동양의 음력 문화가 알려졌고, 해마다 중국 주류 시장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해를 상징하는 동물을 병에 새기거나, 유명 작가와 협력해 동물 그림을 패키지에 그려넣는 방식이다.
세계 최대 종합주류기업 디아지오는 올해 중국계 디자이너 앤젤 첸(Angel Chen)과 손잡고 유명 블렌디드 위스키 브랜드 조니워커 블루 라벨에 토끼 그림 디자인을 입힌 특별 패키지를 선보였다.
한 병에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보르도 와인의 여왕 ‘샤토 마고(Château Margaux)’도 토끼 해를 맞아 1987년, 1999년, 2011년 샤토 마고 3병을 묶은 토끼 해 한정판 샤토 마고 세트를 내놨다. 이 세트는 100개 세트만 판매하고, 각 세트에는 번호와 함께 토끼 묘(卯)자를 양각으로 새겼다.
샤토 마고 관계자는 “1987년산 샤토 마고는 어려운 기후에도 훌륭한 와인을 만든 해라 ‘위기를 극복했다’는 의미가 있고, 1999년산은 손님에게 대접하기 가장 좋은 와인”이라며 “2011년은 역대 샤토 마고 가운데 가장 강렬한(most intense) 와인으로 이제 막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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