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코리아]③ 세계가 新메모리 뛰어들었다… “韓 반도체 지원 ‘찔끔’ 안돼”
경쟁국의 기술 개발 생태계 전략 배워야
소부장 등 생태계 ‘허리’ 기술 자립도 낮아
공정 인력에 치우친 韓, 인재 양성 새판 짜야
지원금 ‘찔끔’ 나눠선 혁신 절대 못 이뤄
“과거 PC 중심 시대에는 인텔이, 스마트폰 시대에는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쥐었지만 최첨단 반도체가 경제·안보의 중심이 된 지금 시대엔 대만 TSMC가 인텔과 삼성전자를 크게 앞지르고 있습니다. 1993년 삼성이 세계 D램 시장을 석권하며 메모리 시장의 맹주가 됐지만, (시스템 반도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 반도체 시장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건 부족했습니다.”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유회준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PIM반도체 설계연구센터 소장)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 시장 점유율 1위, 파운드리 점유율 2위인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유 교수는 1994년 256M SD램 개발, 1999년 휴대전화용 게임 칩 개발, 2008년 의복형 웨어러블 컴퓨터 개발을 최초로 이끄는 등 한국 반도체 산업과 궤를 함께해왔다. 유 교수는 메모리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 반도체에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현재와 미래가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주요 국가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2일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유 교수를 비롯해 반도체 공학 전문가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반도체 소자 분야 전문가 최리노 인하대 신소재공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 韓 메모리 경쟁력 압도적…내년 혹한기 버틸 수 있다
한국 주력 수출품으로 지난 30여년간 한국을 먹여 살린 메모리 반도체는 수요·공급 상황과 경기에 따라 가격 변동이 크다. 최근 국내 업체가 매서운 반도체 한파를 겪고 있는 상황도 대부분 메모리 시황과 관련된 것이다. 실제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급감으로 지난해 4분기 기준 D램 가격은 전년보다 42% 하락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재고 일수도 지난해 초 대비 2배 이상 늘어났다. 남대종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 재고 수준을 보면 올해엔 재고만으로도 영업이 가능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수들은 한국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과 생산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만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반도체 혹한기를 버틸 힘이 충분하다고 입을 모았다. 유 교수는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처럼 수백 가지의 단위 공정 조합으로 이뤄진 초미세 반도체 제품의 양산 기술은 그 자체로 난도가 매우 높은 고급 기술이다”라며 “고수익 제품을 양산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세계 절대 강자로, 다른 나라에서 쉽게 습득하기 어렵고 한국이 지속해 연구 투자를 하고 인력을 양성한다면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같이 소품종다량생산 방식의 칩은 경기 순환에 민감하고 전 세계 수요가 회복될 때까지 수익률은 평년 이하를 기록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차세대 기술 선행 투자 규모가 여타 회사를 능가하기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은 큰 변동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수익 회복 시점에는 다른 회사들과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을 전망이다”라고 했다.
다만 세계 반도체 산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데엔 미흡했다는 평이 나왔다. 유 교수는 “전 세계 반도체 고객이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전략을 펼치면서 산업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한국은 이 점이 다소 부족했다”고 했다.
◇ PIM 같은 ‘차세대 반도체’로 세계 주도해야
교수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선도하는 동시에 이 첨단 기술을 시스템 반도체까지 연결해야 한다는 제언을 내놨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만큼 전 세계적으로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분야가 중시되는 산업 흐름에도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권 교수는 “우선 메모리 반도체는 PIM(프로세싱인메모리·Processing In Memory)이나 P램(상변화메모리) 등으로 기술 다변화가 되어야 한다”며 “메모리 반도체는 용량을 늘리는 것 자체보다 데이터 전송 속도와 캐시메모리 집적도 향상, 전력 소모율 저감 등의 방향으로 성능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패턴의 물리적 크기가 축소되면서, 후공정 단계의 패키징 공정 기술 개선도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 역시 “기존 컴퓨팅 시스템의 한계가 보이는 만큼 PIM, 뉴로 컴퓨팅, 양자 컴퓨팅 등 새로운 기술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교수들이 공통으로 언급한 PIM은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의 기능을 합친 ‘차세대 반도체’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까지 D램을 필두로 한 메모리 반도체가 데이터 저장, CPU나 GPU와 같은 시스템 반도체가 데이터 연산을 맡았다면 PIM은 프로세서와 메모리가 하나의 칩으로 만들어져 데이터 저장과 연산을 혼자서 할 수 있다. 따라서 PIM 반도체가 상용화되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출력해야 하는 고성능 인공지능(AI), 초대형 데이터센터, 고성능 컴퓨팅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일 수 있다.
정부에서는 PIM을 두고 ‘한국 반도체의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라고 강조하고 있다. 앞서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AI 반도체는 크게 PIM과 S램 기반 가속기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 중 PIM은 대한민국 반도체의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다”라고 언급했다. 여기에 과기부는 “PIM은 대한민국 디지털 전략의 핵심과제로, 국내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기술력을 도약시켜 메모리 강국을 넘어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유 교수는 “PIM은 기존의 메모리를 대체할 수 있는 ‘메모리의 미래’이자 궁극적으로 프로세서까지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다”라며 “현재 한국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 경쟁력이 낮지만, 메모리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 반도체 즉, PIM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고 이를 바탕으로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서도 크게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능력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PIM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메모리 분야의 미래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며 “PIM은 메모리 강국인 우리나라에선 현재와 미래가 걸린 중요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PIM 반도체를 삼성전자가 지난 2021년 2월 선보였고, SK하이닉스도 곧바로 PIM 반도체를 공개했다. 다만 국내 반도체 기업은 PIM 기술을 외부에 공개해 세계 수많은 사용자와 함께 PIM 기술 개발 생태계를 만들고 있는 TSMC와 달리, 기술을 공개하고 생태계를 조성하는 부분이 미흡하다고 유 교수는 평했다.
이런 조언과 더불어 최 교수는 “PIM 등 차세대 메모리 기술을 키우는 것만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첨단 기술이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PC, 서버 등에 납품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인텔, AMD와 같은 미국의 거대 CPU 기업이 정한 규격과 사양에 맞춰야 하는 종속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장 규모 역시 시스템 반도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매출 기준으로 메모리 반도체는 30%, 시스템 반도체는 70% 정도를 차지한다.
권 교수는 “일부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기술에서는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파운드리 분야에서 삼성이 3㎚ 공정 기반 양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의 위상이 있으나 여전히 (시스템 반도체를 포함한) 고부가가치 칩 생산, 반도체 공정 장비·소재·부품 등의 기술 자립도는 낮다”며 반도체 생태계 ‘허리’에 해당하는 기술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적은 지원금 사방에 뿌려선 혁신 불가능”
교수들은 국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부 지원이 경쟁국과 비교할 때 턱없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유 교수는 “지금처럼 정부의 지원 가능 예산이 매우 적을 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물뿌리개로 물 주듯 적은 정부 지원금을 사방에 나눠 주는 건 당장의 아우성만 잠재울 뿐 혁신적인 성과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신 “미래를 면밀히 예측하고 공정한 평가와 산업체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주요 기술에 장기적으로 집중 지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 교수는 “정부 차원의 지원 정책이 경쟁국과 차별성을 보이려면 반도체 관련 업체의 공용 기술 개발 플랫폼, 공정 장비 테스트 플랫폼, 기술 지식재산권(IP) 활용을 위한 정책 자금 지원 등의 정책이 맞춤형으로 실행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령 극자외선(EUV) 공정에 필요한 장비·부품·소재 등을 개발하는 국내 중소기업은 성장 잠재력이 있으나 정작 EUV 노광기를 확보하지 못 해 기술 검증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데, 정부가 오픈(개방형) 플랫폼을 조성해 지원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산업계에 부족한 차세대 연구 인력 양성에 정부와 산학(産學)이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 교수는 “현재 국내 대학에서는 대부분 공정 인력이 양성되는데, 과연 진짜 부족한 인력이 공정 쪽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유수 대학에 삼성 혹은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도 많이 설립되고 있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부분 공정 인력이 양성된다”며 “국내 산업계에 시급하게 필요한 컴퓨팅 부문 인력 등 고급 연구 인력이 양성될 수 있게 정부와 대학,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국내에선 공정 이외 분야가 취약해 학생들도 선택을 잘 안 하고 인재를 키울 만한 교수진도 부족하다”라며 “국내에서 인재를 키울 수 있는 풀은 매우 한정적인데, 이를 탈피하기 위해 과감히 투자해 대학에선 경쟁력 있는 해외 교수진을 데려오고 기업은 해외 우수 인력을 섭외해야 하는데, 이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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